일본인 귀족 후견인 만나 육상 전념한 남승룡
모스크바역 도착해 이틀 밤 열차 칸에서 보내
균형 잃고 고꾸라지듯 앞으로 쓰러진 우승 후보
손기정 손 쥐고 마라톤 우승 축하한 히틀러
'알고 보면' 좋을 정보를 두서없이 전달한다. 영화를 흥미롭게 관람하는 팁이다.
*<참외·각설탕 팔다가 육상선수 도전한 손기정(上)>에 이어
*남승룡은 순천의 가난한 집에서 자랐다. 어릴 때부터 달리기를 좋아했는데 열다섯 살 때 전남 대표로 조선신궁대회에 나가 1만m 4위, 마라톤 2위를 차지했다. 경성제대에서 육상·럭비 선수로 활약했던 총독부 관리 스즈키 다케는 천재성을 눈여겨보고 직접 주법을 가르쳐줬다. 남승룡은 보통학교 졸업 뒤 생활이 어려워 집에서 농사일을 거들었다. 그러다가 열아홉 살에 상경했다. 협성실업학교를 다니다가 양정으로 편입했다. 그는 하숙비가 모자라 늘 배를 굶주렸다. 전차 삯을 아끼느라 혜화동에서 경성역 뒤 학교까지 허리띠를 졸라매며 걸어 다녔다. 남승룡은 숱한 시련을 이겨내고 쟁쟁한 장거리 선수로 이름을 떨쳐 메이지 대학에 진학했다.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기타바다케라는 일본인 귀족이 후견인을 자처해 육상에 전념할 수 있었다. 남승룡에게는 묘한 습관이 하나 있었다. 경기 전에 장의차를 보면 좋은 성적을 냈다. 그래서 기카바다케는 그를 자기 차에 태우고는 장의차를 발견할 때까지 동경 시내를 이리저리 찾아 헤맸다.
*와세다 대학에 재학 중이던 김은배는 베를린올림픽에 출전하는 후배들을 위해 격려금 모금 운동에 나섰다. 일본에서 이름을 떨치던 무용가 최승희는 100원이 넘는 큰돈을 내놓았다. 경성의 한식집 식도원도 마늘장을 담가서 보내주는 등 성의를 보냈다.
*손기정을 포함한 마라톤 선수단은 베를린올림픽 개막을 두 달 앞두고 선수단 본단보다 먼저 베를린으로 출발했다. 현지에서 코스를 답사하는 등 적응 훈련하기 위해서였다. 동경에서 배와 기차를 갈아타고 서울로, 다시 만주와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가는 대륙횡단 열차에 올랐다. 당시에는 모스크바를 경유해서 가는 시베리아 철도가 가장 빠른 길이었다. 시베리아를 지나는 데는 1주일이 걸렸다. 이들이 탄 열차는 여객용이 아니라 군 장비 수송 화물용이었다. 때 없이 멈춰 섰다가 예고 없이 제멋대로 달렸다. 어떤 날은 종일 보리밭 사이를 달렸고, 또 어떤 날은 호수를 끼고 한없이 달렸다. 철도는 복선화 작업이 한창이었다. 가는 도중 다른 열차와 만날 때마다 역 구내에서 기다렸다가 달리곤 했다. 이들은 모스크바역에 도착해 따로 시내에 숙소를 잡지 않았다. 이틀 밤을 열차 칸에서 쭈그린 채 보냈다.
*마라톤 선수단은 출발한 지 2주가 지난 7월 17일 베를린에 도착했다. 역에는 독일 주재 일본 대사관 직원들이 마중 나왔다. 만나자마자 "왜 마라톤에 조선인이 두 사람이나 끼었느냐?"고 불만스럽게 물었다. 선수단은 사흘을 시내 호텔에서 지내고 올림픽 선수촌에 들어갔다. 손기정은 시오아쿠와 한방을 썼다. 서른 살이 넘은 염전 노동자 출신 선수였다. 일자무식이어서 제 사인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사토 코치는 그와 스즈키만 따로 불러내 컨디션 조절을 시키는 등 꿍꿍이속을 보였다. 때마침 올림픽 선수촌을 찾은 권태하와 정상희는 비위를 알아내고 일본 대사관에 드나들며 차별 대우하지 말라고 항의했다.
*올림픽 개막을 며칠 앞두고 사토 코치는 출전 선수를 다시 가리는 30㎞ 기록회를 진행했다. 아보스 자동차 경주로와 공원 숲길을 낀 임시코스를 정하고 또다시 예선 대회를 펼쳤다. 스즈키는 1주일 동안 독감으로 고생한 터라 기진맥진했다. 손기정과 남승룡은 두 일본 선수를 뒤로 제쳐 놓고 앞서 달렸다. 그런데 시오아쿠가 별안간 정해진 코스를 이탈해 엉뚱한 샛길(지름길)로 빠져나갔다. 손기정과 남승룡은 제 코스를 다 뛰고서도 각각 1위와 2위로 골인했다. 남승룡은 뒤늦게 들어온 시오아쿠에게 달려들어 침 뱉은 손바닥으로 뺨을 철썩 갈겼다. 그렇게 조선 선수의 출전을 막으려던 일본의 흉계는 실패로 돌아갔다.
*손기정은 8월 9일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스물일곱 나라 쉰여섯 선수와 경쟁했다. 그는 출발선에서 김용식, 장이진 등 열렬히 응원하는 조선 선수들의 모습을 보며 힘을 냈다.
*대다수 선수는 출발 신호와 함께 트랙 한 바퀴를 빠르게 돌아 스타디움을 빠져나갔다. 손기정은 선두 그룹이 너무 빨라서 '저들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하는 근심이 생겼다. 그러나 기세 좋게 앞서 달리던 선수들은 4㎞도 채 못 가서 헉헉거리며 처지기 시작했다. 레이스를 포기한 선수도 있었다. 손기정은 '올림픽이라는 것도 별 게 아니군. 저런 의지로 어떻게들 나왔을까. 나라와 민족의 이름을 건 싸움인데…"라며 안심했다.
*손기정은 10㎞를 네 번째로 통과했다. 어니스트 하퍼와 나란히 뛰었다. 손기정의 오버 페이스를 염려했다고 알려진 영국 선수다. 점차 페이스를 올려 앞질러 나가자 "슬로우! 슬로우!"라며 스피드를 제지했다. 손기정은 알아들었다는 듯 손을 들어 보였다. 이 모습은 레니 리펜슈탈이 만든 기록영화 '민족의 제전'에 클로즈업돼 있다. 그때까지 손기정은 4위였다. 선두는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힌 아르헨티나의 후안 카를로스 자발라였다. 흰 정구 모자를 쓰고 30㎞까지 선두를 유지했다. 2위는 바나나를 까먹으며 달리던 미국의 브라운, 3위는 포르투갈의 디아즈였다. 두 선수는 점차 처지기 시작했다. 자발라도 혹서와 무리한 스피드로 흔들리고 있었다. 손기정은 반환점을 돌아 마주친 자발라의 얼굴에서 몽롱한 눈을 확인하고 큰 힘을 얻었다. 격차는 불과 1분이었다.
*베를린 시가를 벗어날 때까지 최하위 그룹에서 뛰던 남승룡은 자기 페이스대로 달리며 앞서가던 선수들을 착실히 제쳤다. 그는 반환점을 8위로 돌았다.
*손기정은 30㎞ 지점을 지나친 뒤 선두로 나섰다. 자발라가 비스마르크 언덕을 바라보는 길바닥 한복판에서 다리의 균형을 잃고 고꾸라지듯 앞으로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 손기정은 더 쫓아갈 표적이 사라져버리자 불안해했다. 그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이제 내가 선두이다. 인적이 뜸한 길 양편으로는 나무숲이 시커멓다.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해 온다. 쫓아야 할 목표물을 잃어버린 탓인가. 이젠 내가 뒤를 쫓는 무서운 시선들의 표적이 돼 버렸다. 고통도 점차 가중돼 온다. 가슴이 답답하다. 팔에서도 다리에서도 점차 힘이 빠져나감을 느낀다. 끝도 없을 듯이 가물거리는 아스팔트. 그 옆으로 하벨 강의 잔잔한 물결이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빛난다. 수면에 가득 담긴 무수한 은빛 화살…. 가벼운 현기증이 인다. 신기루처럼 옛날 기억이 머리를 스친다. 압록강을 따라 흐르던 뗏목의 긴 행렬. 뗏목을 따라 강변 자갈길을 달리던 나. 홍수로 떠내려가 버린 집. 찌든 살림에 행상 보따리를 이고 나서던 어머니. 뜀박질로 땀 밴 솜옷을 빨아 대기 힘겨워서 여자 고무신을 사 신기던 어머니. 그 고무신을 새끼줄로 묶고서도 달리지 않고는 못 배기는 아들의 고집에 꺾여 끝내는 주머니를 털어 산 '다비'를 행상 꾸러미에서 꺼내 주시던 어머니. 그러고는 눈물로 아들의 성공을 기원하시던 어머니…. 머리를 흔들어 옛 추억을 떨쳐 버린다. 눈앞에 마지막 큰 고비 비스마르크 언덕이 성난 공룡의 목줄기처럼 하늘로 치솟아 있다. 힘을 내자! 여기서만 견디면 모든 게 끝난다."
*손기정은 2시간29분2초에 결승 테이프를 끊었다. 1896년 아테네올림픽에서 스피리돈 루이스가 40㎞를 2시간 58분 50초로 달려 우승한 이래 42.195㎞ 마라톤에서 처음으로 30분대 벽을 넘었다. 하퍼는 2분4초 뒤에 2위(2시간31분23초)로 결승선을 밟았다. 남승룡은 19초 차이로 하퍼를 놓쳐 3위(2시간 31분 42초)를 기록했다.
*손기정은 결승점을 통과하고 오른발에서 통증을 느꼈다. 신발을 벗으니 벌겋게 달아오른 발의 모습이 참혹했다. 그는 '우승자답게 당당하게 걸어가자'고 생각했다. 절룩거리지 않으려고 애쓰며 시상대 맨 윗단에 올라섰다. 국기 게양식에서는 일장기가 올라갔다. 손기정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는 일본 사람이 아니다. 왜 나의 우승에 일장기가 올라가야 하는가. 왜 '기미가요'가 베를린 하늘에 울려 퍼져야만 하는가. 이것이 정말 나의 우승이란 말인가. 가슴에 핏자국처럼 박힌 일장기. 나라 빼앗긴 족속의 낙인을 지워 버리지 못한 내 꼴이 저주스럽다. 나는 한 번도 일본을 위해 뛰어 본 적이 없다. 나와 내 나라 조선을 위해 뛰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나의 우승은 지금 나라 빼앗긴 슬픔, 빼앗긴 땅에서 태어난 절망만을 더욱 절실하게 되새겨 줄 뿐이로구나. 다시는 뛰지 않으리라. 일장기의 멍에가 사라지지 않는 한 나의 마라톤은 다시 없으리라."
*나치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는 베를린하계올림픽에서 로열박스에 나와 우승자에게 격려의 악수를 해주곤 했다. 손기정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덥석 손을 쥐고 흔들며 "마라톤 우승을 축하한다"고 말했다. 손기정은 "독일 국민이 성원해줘서 이겼다. 고맙다"고 화답했다.
*손기정의 마라톤 우승 장면이 담긴 '민족의 제전'은 동경에서 개봉했다. 수천 명이 극장을 에워싸고 입장 차례를 기다릴 정도로 흥행했다. 손기정은 경성의 경일뉴스관에서 남승룡과 함께 감상할 수 있었다. 경성 사람들은 라디오로만 들었던 감격적 순간을 뒤늦게나마 시각을 통해 재확인했다.
*동아일보 체육 담당 이길용 기자는 일본 신문 슈칸 아사히 스포츠에서 월계관을 쓴 손기정의 사진을 오려내고 조사부의 이상범 화백에게 부탁해 일장기를 지워버렸다. 조선총독부는 발칵 뒤집혔다. 일본 경찰은 동아일보 문을 박차고 들어가 이 기자와 이 화백은 물론 현진건 사회부장, 신낙균 사진부장 등을 붙잡아갔다. 약 40일 동안 차고 때리고 따귀를 올리며 벌물을 먹였다. 일장기 말살 사건이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이뤄졌다는 자백을 받으려고 날뛰었다. 동아일보는 결국 네 번째 정간 처분을 당했다. 안녕 질서를 방해한 책임으로 신문지법 20조 2항에 의거해 발행이 정지됐다. 조선총독부는 사내 위험인물을 모두 파면한다는 조건으로 동아일보 복간을 허락했다. 이 바람에 송진우 사장, 김준연 주필, 설의식 편집국장, 현진건 사회부장, 이상범 화백, 이길용 기자 등 열 명이 쫓겨났다.
*손기정의 개선은 초라했다. 나가사키에서 형사들이 범죄자 대하듯 총칼 소지 여부부터 꼬치꼬치 캐물었다. 삼엄한 감시의 눈초리는 고베에서도 뒤따랐다. 그와 만난 사람은 모두 일본 경찰에 불려가 조사받았다. 동경으로 가는 기차역마다 올림픽 개선을 환영하는 인파가 들끓었으나 손기정은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무서웠다.
*손기정은 1936년 10월 8일 황욱과 함께 프로펠러가 달린 비행기를 타고 대한해협을 건넜다. 동경을 떠나 후쿠오카로, 울산을 거쳐 여의도 비행장에 안착했다. 그곳에는 형사와 순사들이 깔려 있었다. 불미스러운 사고를 예방하고 손기정을 보호한다는 명목이었다. 비행장 입구를 막고 서서 환영 나온 인파를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손기정은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라 없는 민족에겐 올림픽 우승을 기뻐하고 축하할 기회조차 없었다. 올림픽 우승자도 일본인들에겐 한낱 천덕꾸러기요 오히려 성가신 요주의 인물이었다. 나에 대한 환영 축하 행사는 일체 금지됐다. 하다못해 양정 급우들의 환영 다과회조차 일인들의 눈을 두려워한 학교 측의 반대로 열리지 못했다. 나의 우승을 계기로 무슨 사고라도 날까 봐 모두 벌벌 떨었다. (중략) 태평양 전쟁을 앞두고 조선총독부는 내선일체를 부르짖고 있었다. 그들은 때마침 나의 우승 소식을 듣자 정치적 선전물로 이용하기 위해 대대적인 환영을 준비했다. 그러던 중에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살 사건이 터졌고, 깜짝 놀란 총독부는 모든 환영 행사를 금지했다."
*손기정은 조선일보 기자 고봉오의 소개로 강복신을 만나 결혼했다. 초면은 아니었다. 그가 평북 대표로 조선신궁대회에 나갔을 때 강복신은 평남 대표로 여자 200m 경기에 출전해 우승했다. 조선 여자 올림픽에서도 평양 서문여고 선수로 출전해 200m와 멀리뛰기에서 1위를 차지했다. 손기정의 어머니는 "우리 집안은 원래 강 씨가 들어와 망한 집안"이라며 결혼을 반대했다. 하지만 손기정은 운동선수가 되겠다고 집을 뛰쳐나왔을 때처럼 쌀쌀한 겨울에 평양 공회당에서 결혼식을 강행했다. 고향인 신의주에서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양정 동창들이 서울에서 올라와 울적한 그를 위로했다.
*손기정은 신혼여행도 못 가고 열차에서 아내와 헤어졌다. 아내는 동덕고녀에 귀임하기 위해 서울에서 내리고, 손기정은 그 길로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 대학에 복귀했다. 졸업 뒤에는 연건동에 방 두 개를 얻어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손기정은 조선 육상경기연맹의 소개로 저축은행에 들어갔다. 내근사원이었으나 예금과 적금 기탁을 받아오는 조건으로 10원을 더해 봉급 40원을 받았다.
*손기정의 어머니는 1942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한 번 제대로 모셔 보지 못한 걸 후회한 아들은 이듬해 아내마저 간장염으로 잃었다. 모처럼 얻었던 안정된 가정생활은 그렇게 5년 만에 끝나버렸다.
참고 자료 : 손기정 지음·발행처 휴머니스트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2022)', 김지환 지음·발행처 책과함께 '모던 철도(2022)', 조동표 지음·발행처 삶과꿈 '마라톤은 살아있다(1995)', 최인진 지음·발행처 신구문화사 '손기정 남승룡 가슴의 일장기를 지우다(2006)', MEDIA2.0 편집부 지음·발행처 MEDIA2.0 '스포츠 2.0(2007~2008)' 등.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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