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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부산대에 확인하고 기사 쓰라" vs 김근식 "후안무치"

수정 2023.05.29 10:39입력 2023.05.29 10:39

조국 "부산대 조사위, '표창장 영향無'"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딸 때문에 (부산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입시에서) 떨어진 학생은 없다'고 한 발언을 두고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시발점은 지난 26일 오후 대구 북구 엑스코에서 열린 '가불 선진국에서 펼치는 법고전 산책 이야기' 북콘서트다. 조 전 장관은 딸 조민씨의 부산대 의학전문대학원 입학 취소와 관련한 질문에 "부산대 조사위원회 결과에 따르면 동양대 표창장은 입시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고, 저희 딸 때문에 다른 학생이 떨어지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이에 윤희석 국민의힘 대변인은 28일 논평을 통해 "공정과 정의의 가치를 짓밟았던 그 큰 죄업을 말 한마디로 부인해 버리는 편한 인식 구조가 부러울 따름"이라고 꼬집었다.


언론 보도로 논란이 커지자 조 전 장관은 28일 페이스북에 "대구 북콘서트에서 나온 제 답변의 근거가 무엇이냐는 언론 문의가 많아 일괄적으로 답한다"면서 2021년 9월 30일 작성된 부산대 입학전형공정관리위원회의 자체 조사 결과서 내용을 공유했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조 전 장관은 결과서 19~21면에 '조민이 1단계 서류전형을 통과한 것은 공인영어성적이 월등히 우수하였기 때문', '2단계 면접전형은 당락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문제 된 경력 서류와 관련해 조민 지원자는 4개의 경력을 지원서에 기재하고 증빙서류를 제출하지 않았으며, 동양대 표창장만 제출함', '문제 된 경력을 기재하지 않았거나 동양대 표창장을 제출하지 않았다면 불합격하였을 것이라는 논리는 타당하지 않다' 등의 내용이 적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상의 결과보고서는 정경심 교수의 항소심 형사판결 이후에야 공개됐다"며 "즉 형사판결은 위 결과보고서가 없는 상태에서 내려졌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와 별도로 제 딸 조민은 법원의 최종 판결에 겸허히 승복할 것"이라고 부연했다.


이에 국민의힘 서울송파병 당협위원장인 김근식 경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29일 페이스북에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위조 서류 때문에 딸이 합격하지 않았고 딸 때문에 떨어진 사람이 없다는 해괴한 주장에 대해'라는 제목의 글을 올리며 "제발 괴물이 되지 말고 사람이 되시라"고 응수했다.


그는 "시험에서 부정행위 하는 사람들은 성적이 우수하거나 상위권 학생이 많다. 그 문제 틀려도 어차피 상위권인데 워낙 강한 자기애와 이기심 때문에 커닝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며 "커닝을 안 했어도 어차피 그 등수이면 부정행위는 처벌되지 않는 건가"라고 물었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이어 "'시험 요강'에 '부정행위로 인해 석차가 바뀌지 않는 경우는 무방하다'고 친절히 안내해야 하나"라며 "'모집 요강'에 '허위서류를 제출하면 입학을 취소한다'가 아니라, '허위서류를 제출해서 타인을 탈락시킨 경우'로 한정해서만 합격을 취소한다고 써야겠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스포츠 경기에서 약물 복용의 경우도 대개 최상위권의 세계적 기량을 가진 선수들이 많다"면서 "약물 없이도 우승할 수 있으면 약물이 적발돼도 죄가 아닌 건가"라고 따져 물었다.


끝으로 그는 "서류를 위조했지만, 그 때문에 탈락자가 없으니 죄가 아니라는 궤변이야말로 조국 아니면 불가능한 후안무치의 극한"이라면서 "조국 씨, 부산대 조사단이 조민으로 인한 탈락자가 없다는 데도 왜 그럼 조민을 입학 취소했을까. 한 번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시라"고 일갈했다.


앞서 부산대는 정경심 전 교수 관련 재판에서 조민 씨가 의전원 모집 때 제출한 동양대 총장 표창장 등이 위조라는 판결이 나오자 지난해 4월 '허위서류를 제출하면 입학을 취소한다'는 신입생 모집 요강을 근거로 조 씨의 입학을 취소했다. 조 씨는 입학 취소 처분 집행정지 신청을 냈다. 행정소송을 통해 입학 취소 처분 자체를 취소해달라고 청구했으나 재판부는 기각했다.




김은하 기자 galaxy65657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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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드라마 명소 포항, 타이베이 국제관광박람회서 ‘대만’ 사로잡다
수정 2023.05.29 15:01입력 2023.05.29 15:01

대규모 행사서 ‘포항 홍보관’ 운영

‘K-드라마 촬영지’, 관광명소 홍보

포항시는 지난 26일부터 29일까지 4일간 ‘2023 타이베이 국제관광박람회’에 참가해 K-드라마 인기 촬영지 포항의 브랜드 인지도 제고와 대만 관광객 유치를 위해 ‘포항 홍보관’을 운영했다.

26일부터 29일까지 ‘2023 타이베이 국제관광박람회’에 참가해 브랜드 인지도 제고와 대만 관광객 유치를 위해 ‘홍보관’을 운영한 포항시.

이번 박람회는 타이베이시 여행상업동업공회가 주최, 12개국, 205개 기관이 참여해, 타이베이 관광박람회 중 가장 많은 참관객이 참여하는 대규모 행사다.


포항시 홍보관에서는 인기 한류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갯마을 차차차’의 주요 촬영지인 ▲청하공진시장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 등의 드라마 명소와 함께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뜨는 일출 명소 호미곶 ▲대한민국 공간문화대상 대통령상에 빛나는 포항 스페이스워크 ▲아시아 도시 경관상 본상을 받은 포항 철길숲 등 포항의 대표 명소를 적극 홍보했다.


이날 포항시 홍보관을 방문한 타이베이시민은 “중추절 연휴 기간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 촬영지로 유명한 포항에 가족들과 함께 방문할 계획”이라며 기대감을 보였다.


시 관계자는 “대만 현지인들에게 K-드라마 촬영지, 해양 문화관광 도시 포항의 매력을 알리는 좋은 기회가 됐다”며 “포항만의 다채로운 관광인프라를 조성해 국내외 관광객 유치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전했다.



영남취재본부 이동국 기자 marisdy@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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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보면]칸이 세계 최고 영화제로 도약한 비결은…(上)
수정 2023.05.29 14:49입력 2023.05.29 10:00

게리 쿠퍼 등 초청하고도 개최 불발된 이유
서막 올린 영화는 장 콕토 '미녀와 야수'
감독들 항의에 개최 하루 만에 문 닫기도

칸국제영화제는 명실공히 최고의 영화 축제다. 통상 베를린, 베네치아와 함께 세계 3대 영화제로 불리나 명성과 위상이 가히 압도적이다. 부름에 주저하는 스타가 없을 정도. 내로라하는 거장들도 작품이 초청되길 고대한다. 지중해 작은 해변 마을의 축제가 이토록 성장한 동력은 무엇일까. 핵심은 영화의 예술과 산업, 양극단을 교묘히 오가는 줄타기에 있다. 엄격한 잣대로 예술성을 판단해 영화의 본질적 가치를 지키는 동시에 할리우드 스타 등을 불러 모아 마켓 활성화를 꾀한다. 부산국제영화제 등에서 일한 안수정 씨는 저서 '레드카펫'에서 "이 균형이 깨지지 않는 한 칸영화제는 칸마켓(마르쉐)과 함께 앞으로도 수많은 영화인과 관광객을 매년 5월 지중해 해변의 이 작은 도시로 불러들일 것"이라고 확언했다.


'알고 보면' 좋을 정보를 두서없이 전달한다.


[이미지출처=AP연합뉴스]

*프랑스 정부는 1932년 파시스트 무솔리니 정권에서 창설한 베네치아영화제가 세계 영화계에서 주도적 위치를 점하자 위기감을 느꼈다. 특히 장 자이 교육부장관은 영화 종주국으로서 자존심 회복과 서방 자유세계 진영을 대표할 영화제 창설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에 공감한 미국과 영국 민간인들로부터 후원받아 1939년 칸영화제 개최를 선언했다. 루이스 뤼미에르가 그해 6월 위원장직을 수락해 9월 1일부터 30일까지 진행하기로 했다. 상영할 작품들을 섭외하고 게리 쿠퍼, 매 웨스트 등 할리우드 스타들을 대거 초청했다. 개막일 전날 전야제도 성대하게 열었다. 그러나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고, 9월 3일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대한 전쟁 선언을 공표해 원대한 계획은 틀어져버렸다. 이에 따라 공식적인 개최 연도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 1946년이 됐다. 프랑스 외무부와 칸 시청이 본격적인 출발을 주도했다.


*1946년은 칸뿐만 아니라 유럽 여러 곳에서 중요한 영화제들이 문을 연 해다. 칸영화제가 열리기 1주일 전인 8월에 로카르노영화제가 개최됐고, 그 뒤에는 전쟁으로 중단됐던 베네치아영화제가 재개됐다. 동유럽을 대표하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카를로비 바리영화제도 이해에 설립됐다.

*칸영화제의 서막을 올린 영화는 시인 겸 극작가 장 콕토가 제작한 '미녀와 야수'다. 1946년 9월 20일 상영됐다.


*칸영화제는 1948년과 1950년 예산 확보 실패 등으로 행사를 열지 못했다. 당시 재정구조는 지금의 칸영화제와 달리 매우 열악했다.


[이미지출처=AP연합뉴스]

*칸영화제는 초기에 정치성을 배제한 예술성을 전면에 내세워 홍보했다. 하지만 이 축제는 이탈리아, 독일 같은 파시스트 정부의 베네치아영화제 필름 선정 등에 대한 반발로 태동했다고 봐야 한다. 미국과 영국 민간인들로부터 지원받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칸영화제의 실질적 첫 개최일은 1946년 9월 20일이다. 영화인 300명 정도가 참석했다. 이듬해에는 국제영화제라는 구실로 열여섯 나라 영화를 초청했다. 평등 원칙에 근거해 한 나라당 한 명의 대표로 배심원단을 구성했다.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정치가인 앙드레 말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에 영화담당정보장관이 됐다. 그는 "영화는 산업"이라고 강조하며 자국 영화 재건을 꾀했다. 대표적인 노력의 결실은 미국 영화를 저지하고 프랑스 영화를 보호하기 위한 스크린쿼터 협상인 블럼비른 협정. 프랑스는 자국 영화 보호를 위해 3달에 4주 기간에 해당하는 스크린쿼터 제도를 설치했고, 나중에는 3달에 5주로 기간을 더 늘렸다. 지역주의적 경향은 정부뿐 아니라 누벨바그 예술가들에게서도 나타났다. 그렇게 지역문화 정체성에 영향을 받은 칸영화제는 오랫동안 자국중심주의적 성격을 유지하며 지역정체성을 보호했다. 아시아 영화나 미국의 상업 영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건 1980년대부터다.


*유럽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전쟁 포화로 비통함에 잠겨있었다. 특히 프랑스는 나치의 점령으로 심각하게 손상된 국가적 자존심과 정체성을 회복시켜야만 할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칸영화제의 성공적 개최는 상처 입은 프랑스 국민의 자긍심을 회복시키고 단합하게 하는 데 중대한 역할을 했다.


[이미지출처=AP연합뉴스]

*프랑스는 베네치아영화제를 견제할 목적으로 칸영화제를 마련했으나 이탈리아와 비밀 계약을 맺었다. 직접적 경쟁을 피할 방법을 논의한 끝에 1951년 개최 시기를 봄으로 옮겼다. 칸영화제는 1959년 최초로 마켓을 설립하면서 베네치아영화제와 대등한 관계로 발전했다. 상업적 캐릭터를 만들어내고,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 교류를 촉진했다. 오늘날 국제영화제 표준으로 자리 잡은 최초의 플랫폼이라고 할 수 있다.


*1968년 칸영화제는 파리에서 일어난 5월 혁명 여파로 개막하고 며칠 만에 중단됐다. 장 뤽 고다르, 프랑수아 트뤼포 같은 누벨바그 감독들의 반대를 이기지 못했다. 그해 설립된 영화감독 협회는 이듬해 비경쟁 부문에 감독주간을 신설했다. 좀 더 진보적이고 예술적인 작품을 선보이기 위함이었다. 이 시기 칸영화제의 지향점은 영화 예술의 최전선에서 다른 어떤 영화제보다 예술영화의 지위를 옹호하고 헌신하는 영화 축제가 되는 것이었다. 프랑스 정부로부터 전액을 지원받으면서도 어떤 간섭도 받지 않는 독립적인 운영체계를 갖춰갔다. 지금은 우리나라 영화진흥위원회에 해당하는 국립영화진흥기관(CNC)로부터 예산의 60%를 지원받는다.


*감독주간은 텔레비전과 비디오 등 전자 영상 매체의 출현으로 세계 곳곳에서 위기를 맞은 영화감독들에게 좀 더 많은 관심을 두자는 목적으로 설립됐다. 그 배경인 장 뤽 고다르, 프랑수아 트뤼포 등 젊은 감독들의 저항운동은 꽤나 거칠었다. 영화제 본부의 대상영실을 점거하고 상영 중이던 영화를 멈추게 한 다음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프랑스의 영화인들은 한 달 동안 전국에서 파업하고 있는 노동자들 그리고 노동자들을 위해 큰 도시에서 시위하는 학생들과 연대한다"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시대가 이러한데도 안이하게 영화를 논하고 파티를 즐기는 칸영화제는 당장 멈춰야 한다"고 촉구했다. 성명이 발표되고 밀로스 포먼, 알랭 레네, 루이 몰, 클로드 를루슈, 로만 폴란스키 등 감독들은 자신들의 작품을 돌려달라며 항의했고, 영화제는 시작한 지 하루 만에 문을 닫았다.


[이미지출처=AP연합뉴스]

*영화감독들의 항의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이들은 당시 프랑스 문화부장관이던 말로가 조그만 실수를 핑계 삼아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원장 앙리 앙글루아를 해고하려는 데 분노했다. 즉시 시네마테크 수호휘원회를 조직하고 복직 투쟁에 나섰다. 그 결과 앙글루아는 일자리를 되찾았으며 투쟁에 참가했던 이들은 의기투합해 프랑스 감독협회를 만들었다. 칸의 감독주간은 바로 이 조직이 주도해 신설됐다.


*앙글루아는 1936년 설립된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를 세계에서 가장 큰 영상자료원과 영화박물관으로 키운 신화적 인물이다. 그는 영화 자료를 보존했을 뿐만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점령으로 사라질 위험에 놓여 있던 영화들을 구해내고 영화의 생산과 상영에 관련된 모든 기기를 수집해 앙글루아 영화박물관을 만들었다. 그의 시네마테크는 트뤼포, 고다르, 리베트, 샤브롤, 레네 등 1950년대 말 프랑스 영화를 새롭게 한 누벨바그 세대가 매일 살다시피 했던 영화 공부의 천국이었다. 이들이 '시네마테크의 아이들'이라고 불린 이유다.


*배우 소피아 로렌은 1966년 여성 최초로 칸영화제 경쟁 부문 심사위원장에 임명됐다.


*칸영화제는 1972년 영화 선정방식을 변경했다. 자국 영화를 고르는 위원회와 외국 영화를 선별하는 위원회를 각각 조직했다. 1978년에는 선정 영화 수를 줄이고 영화제 시간을 열사흘로 단축했다. 영화학계에 의해 구성되던 심사위원단에는 이때부터 유명 인사와 전문가들이 가세했다.


*칸영화제는 태동 뒤 약 20년 동안 동서가 대치한 세계정세로 인해 미국의 냉전 정치학 무대 역할을 대신해야 했다. 이데올로기와 외교적 개입으로 소비에트 연방에 속한 나라들은 칸영화제 작품 출품을 거부했다.


[이미지출처=AP연합뉴스]

*1983년은 칸영화제의 정체성과 방향에 중대한 전환점이 된 해다. 우선 집행부의 메인 행사장을 팔레 드 페스티발로 옮기는 등 영화제 규모를 대폭 확장했다. 이를 계기로 칸영화제는 순수한 예술영화만을 옹호하던 기존 방향성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영화제의 본부가 된 팔레 드 페스티발은 새로운 정체성의 상징이 됐다. 두 번째 변화는 마켓 비중의 강화다. 칸영화제는 스폰서 기업들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면서 점차 기업적 팽창주의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예술로서 영화 지위를 옹호한 기존 역할에 상품으로서의 영화 가치를 평가하는 시장 기능을 대대적으로 추가했다. 서로 다른 두 가치가 아슬아슬하게 공존하는 영화제로 탈바꿈하는 순간이었다.


*팔레 드 페스티발과 콩그레(영화제 본부)는 1983년 지어진 큼직한 콘크리트 건물이다. 흔히 벙커(창고)로 불릴 만큼 건축미와는 거리가 멀다. 마켓 부스들이 들어서 있는 지하실에서 5층 영화제 사무실까지 연결된 통로는 이리저리 여러 방향으로 갈라져 있어 첫 방문자에겐 마치 미궁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지중해의 푸른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영화제 건물 위의 전망만큼은 일품이다.


참고 자료 : 박강미 지음·발행처 스토리하우스 '국제영화제의 탄생(2013)', 안수정 지음·발행처 명인문화사 '레드카펫 : 웰컴 투 필름페스티벌(2014)', 임안자 지음·발행처 본북스 '내가 만난 한국영화(2014)', 김동호 지음·발행처 문학동네 '영화, 영화인 그리고 영화제(2010)' 등.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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