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 침공 이전 대비 3배 많아
전쟁무기 제작 위해 수입 열 올려
美 반도체 수출지 파악 못한다는 지적도
러시아가 미국 정부의 반도체 수출 규제를 뚫고 홍콩과 중국을 경유해 1조원에 달하는 미국산 반도체를 수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러시아는 서방 제재 여파로 반도체를 구하지 못해 무기 생산에 차질을 겪자, 중국을 통한 우회 전략을 구사한 것으로 보인다.
11일 니혼게이자이 신문이 입수한 인도의 정보조사업체 ‘엑스포트 지니어스’의 통관데이터에 따르면 러시아는 지난해 2월24일부터 같은 해 12월 말까지 전세계에서 총 10억7756만달러(1조4245억원) 규모의 반도체를 수입했다. 이는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의 수입 총액(3억6671억달러)대비 3배나 많다.
총 수입액 중 미국 반도체가 차지하는 금액은 7억4864만달러에 달한다. 이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이전보다 2.8배나 많은 수준이다.
러시아는 미국의 제재로 미국산 반도체 수입이 가로막히자, 홍콩과 중국을 경유하는 방식으로 수출금지 조치를 우회했다. 통관데이터에 따르면 러시아는 미 반도체 수입 물량의 75%인 5억7414만달러를 두 국가를 통해 들여왔다. 두 국가 중에서는 홍콩에서 들여온 물량이 더 많았다. 나머지 25%는 튀르키예(6%), 몰디브(6%), 아랍에미리트(4%) 등의 국가들을 우회해 수입했다.
러시아는 홍콩과 중국 내 자국과 관계가 있는 신생기업들을 적극 활용해, 미국의 눈을 피했다. 니혼게이자이에 따르면 지난해 2~12월 간 13회에 걸쳐, 1만개 이상의 미국산 반도체를 러시아에 판매한 홍콩 기업의 설립자는 러시아인으로 파악됐다. 이 기업은 러시아의 한 부호가 소유한 기업에 반도체를 수출했다.
중국과 홍콩의 신생기업들은 주로 미국의 반도체 기업인 인텔과 AMD의 마이크로프로세서와 자일링스의 FPGA(프로그래밍을 지원하는 반도체) 등을 러시아 기업에 팔았다. 이 외에도 여러 기업들이 미국산 반도체를 러시아로 들였는데, 이들은 제재를 받으면 다시 기업을 설립하는 방식으로 러시아에 반도체를 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반도체 웨이퍼를 들어 보이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이미지출처=AP연합뉴스]러시아는 전쟁 무기 제작을 위해 미국산 반도체 수출에 열을 올린 것으로 보인다. 미사일 궤도와 목표를 제어하려면 연산 처리 능력이 뛰어난 최첨단 반도체가 다량으로 필요하다. 러시아는 옛 소련 시절부터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기술과 부품에 의존하며 무기를 만들어 왔다. 하지만 지난해 2월부터 미국이 러시아를 상대로 한, 군용부품과 반도체 수출을 전면금지하면서 무기고에서 첨단 미사일이 바닥나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 1월 우크라이나 현지 매체 ‘키이우 인디펜턴트’는 러시아는 무기 부족으로 최근 이란제 드론과 자국의 구식 미사일, 고정밀 탄도미사일을 섞어 사용하는 전술을 구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미국이 전세계에서 유통되는 반도체들의 최종 행선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벨기에의 플랑드르 평화 연구소인 디 데릭 캅스 선임연구원은 "글로벌 공급망을 통해 판매되는 미국 반도체들은 최종 수출지역을 파악하고 감독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미국의 반도체 기업들은 대러 수출은 자사의 결정이 아니라며 강력히 항변하고 나섰다. 인텔은 니혼게이자이에 "러시아 고객에 대한 제품 출하는 모두 금하고 있다"며 "당사는 수출 규제를 준수하고 제품이 인권 침해에 사용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AMD 또한 "당사의 정규 판매 대리업자들은 세계의 모든 수출 규제를 준수하고 있다"며 "(니혼게이자이가 지적한 수출 기업은) 모두 정규 대리점이 아니다"라고 거듭 강조했다.
이지은 기자 jelee0429@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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