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제정 7년 만에 공개된 北인권보고서
"북한에선 공권력으로 자의적 생명박탈"
통일부 "첫 공개 보고서라는 점 유의미"
하이힐이나 화장품 등 한국 제품을 팔던 북한 주민이 공개 처형됐다는 증언이 나왔다. 살인 등 강력범죄뿐만 아니라 한국 영상물 시청 및 유포, 종교 행위 등 기본적인 자유권에 해당하는 사안에도 사형이 집행되는 등 북한 공권력에 의한 살인이나 공개처형이 빈번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통일부는 2017∼2022년 탈북한 탈북민 508명의 증언을 바탕으로 '2023 북한인권보고서'을 작성해 30일 공개했다. 북한 인권법 제정 7년만으로, 지난 정부가 북한의 반발을 우려해 비공개한 보고서다. 윤석열 정부는 북한의 참혹한 실태를 낱낱이 알린다는 방침에 따라 공개를 결정했다.
보고서는 특히 구금시설에서 인권 유린 행위가 빈번하게 벌어지고, 당사자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강제적 생체실험까지 이뤄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시중에 유포된 동영상에서 임신 6개월 여성이 손가락으로 김일성 초상화를 가리켰다가 공개처형 당한 일도 수록됐다.
"절차도 없이 마구잡이로 즉결 처형"
탈북 청소년들이 꽃제비 시절 경험담을 선보인 연극의 한 장면보고서에 따르면 북한 국경에서 사법 절차를 거치지 않고 즉결 처형하는 사례들이 꾸준히 수집됐다. 2019년 북·중 접경 지역에서 밀수 작업에 동원된 한 짐꾼은 절도를 하다 발각돼 경비초소에 억류됐고, 도주를 시도하다 보위원에 의해 사살됐다고 한다.
북한은 2020년 이후 코로나19 방역을 이유로 '국경 봉쇄 지역에 출입할 경우 사전경고 없이 발견 즉시 사살한다'는 방침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으며, 실제로 이런 방침에 따라 봉쇄 지역 출입자가 사살된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교화소에서 도망치려다 붙잡힌 수형자가 처형되는 걸 목격했다는 증언들도 나왔다. 함흥교화소에선 2016~2017년 도주 중 검거된 수형자에 대한 총살이 있던 것으로 전해졌다. 도주하다 검거된 수감자의 목을 밧줄로 묶어 정문 꼭대기에 매달아 총을 3발가량 쏜 뒤 시신을 땅에 내려놓고 동료 수형자들로 하여 돌을 던지게 한 사례도 있었다고 보고서는 설명했다.
'김일성 초상화' 가리켰다고 공개처형
김일성·김정일의 초상이 담긴 휘장 '쌍상'한국 영상물을 시청했거나 종교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사형이 집행되는 경우도 많았다. 한 탈북민은 "2018년 평성시에서 18명에 대한 공개재판이 있었는데, 성경을 소지하고 기독교를 전파한 1명이 사형을 선고받고 곧바로 공개 총살되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2019년 평양에선 몰래 지하교회를 운영하다 적발된 단체 운영자 5명이 공개처형됐다.
비교적 최근인 2020년 양강도에선 한 남성이 중국에서 한국 영상물을 들여와 주민들에게 유포한 행위로 공개 총살이 이뤄졌고, 2018년에는 하이힐이나 화장품 등 한국 제품을 몰래 판매하던 체포된 사람들이 줄줄이 공개 총살을 당했다는 증언도 수집됐다.
임신한 여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2017년 북한에선 한 여성이 집안에서 춤을 추는 모습이 담긴 동영상이 풀렸다. 이 여성은 당시 임신 6개월이었는데, 영상 속에서 손가락이 김일성 초상화를 가리켰다는 이유로 붙잡혀 공개처형 당한 것으로 파악됐다.
女 인권유린 심각…장애인 생체실험까지
옥수수밭에서 일하는 북한 주민들의 모습보고서는 특히 여성이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인권 유린이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지적했다. 여성의 경우 가정은 물론 학교와 군대, 구금시설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각종 폭력에 노출돼 있다는 것이다. 특히 구금시설에선 소지품을 확인하겠다며 나체로 검사를 하는가 하면, 여성의 질 내부까지 직접 확인하고 남성 계호원에 의한 자궁 검사까지 자행되고 있다는 증언도 나왔다.
2014년 중국에서 강제 송환된 여성이 구금시설에서 낳은 아기를 '중국 아이'라는 이유로 태어나자마자 계호원(교도관)이 살해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공개 처형을 목격했다는 증언은 조사가 시작된 2017년부터 최소 2020년까지 해마다 수집됐다.
생체실험이 당사자 동의 없이 실시되고 있다는 증언도 나왔다. 생체실험은 주로 83호 병원 또는 83호 관리소로 불리는 곳에서 조현병 등 정신질환자나 지적장애인을 대상으로 이뤄졌다고 보고서는 밝혔다.
"북한인권 개선 노력"…기존 보고서 수준 한계점도
윤석열 대통령 [이미지출처=연합뉴스]북한인권법의 실질적 이행에 강력한 의지를 드러냈던 윤석열 대통령의 주문에 따라 발간된 이번 보고서는 2017~2022년 사이 탈북한 508명이 증언한 1600여 개의 인권침해 사례를 망라했다. 정부 차원에서 발간하는 보고서에서 북한인권 실태가 다뤄졌다는 점, 북한인권 개선을 위한 우리 정부의 노력을 공식화하는 계기로서 의의를 가진다.
다만 첫 공개 보고서인 만큼 한계도 분명하다. 인권 실태에 대한 시계열적 비교나 분석까지 담아내진 못했고, 수집된 증언들을 그대로 보여주는 데 그쳤다는 지적이 나온다. 또 기존에 통일연구원이 발간해온 '북한인권백서'와 유사하고, 유엔이나 국내외 민간단체(NGO)에서 내놓은 관련 보고서와 겹치는 내용이 많다는 한계도 있다.
통일부 당국자는 "이번 보고서가 2016년 초당적 협력으로 제정된 북한인권법에 따라 발간하는 정부의 첫 공개 보고서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며 "다른 정부 기관에서도 북한인권 실태를 조사해 공개보고서를 발간한 적은 없었다"고 설명했다.
통일부는 이번 보고서가 북한인권 분야에서 공신력 있는 기초자료로 활용될 수 있도록 책자 2500부를 발간하고, 온·오프라인으로 배포하겠다는 방침이다. 또 영문판 발간을 추진해 국제사회에도 알릴 기회를 마련할 예정이다.
장희준 기자 jun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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