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도미노 파산 우려 비상 대책
유동성 지원 위해 기금 조성
美 재무부 예금 보증…"구제금융 성격" 분석도
금융 시스템 위기 전이 가능성 낮아
미국 정부가 파산한 실리콘밸리은행(SVB)에 예금주가 맡긴 돈을 액수에 상관 없이 전액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유동성 부족에 처한 은행에는 자금을 대출해주기로 했다. SVB 사태로 인해 다른 은행으로 도미노 뱅크런(대규모 예금 인출) 사태가 잇따르고 금융 시스템 전반의 위기로 확산, 글로벌 금융 시장에 메가톤급 충격이 발생하는 상황을 막기 위한 비상 조치로 풀이된다. 미 재무부는 구제금융은 없다고 선을 그었지만 정부 개입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사실상 구제금융 카드를 꺼낸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미 재무부와 연방준비제도(Fed),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는 12일(현지시간) SVB에 고객이 맡긴 돈을 보험 대상 한도와 상관없이 전액 보증한다고 발표했다. 재닛 옐런 재무부 장관이 Fed와 FDIC의 권고를 조 바이든 대통령에게 보고한 뒤 모든 예금주를 완전히 보호하는 방식의 사태 해법을 승인받았다. 다만 주주, 담보가 없는 채권자 일부는 보호 대상에서 제외됐다.
정부는 "SVB 예금주들은 13일 월요일부터 모든 자금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며 "납세자들이 SVB 손실과 관련해 책임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FDIC 예금 보호 한도는 최대 25만 달러다. 하지만 연방 은행법에 따르면 금융 시스템에 위험이 발생할 때 보험 대상이 아닌 예금 전액을 보호할 수 있다. 미 정부는 이 조항을 근거로 SVB 사태를 진화할 해법을 찾아냈다.
아울러 Fed는 은행에 유동성을 지원하기 위해 새로운 기금(BTFP)을 조성하기로 했다. 이 기금은 미 국채와 주택저당증권(MBS) 담보를 내놓는 은행에 1년간 자금을 대출하는 용도로 쓰인다. 특히 주목되는 대목은 담보 가치를 시장가가 아닌 액면가로 평가하겠다고 밝힌 점이다. SVB가 보유한 국채 중 상당수가 Fed의 금리인상으로 평가가치가 떨어져, 당장 매각할 경우 액면가보다 낮은 금액을 받게 되는 상황을 감안한 조치다. 미 정부는 관련 기금 마련을 위해 재무부 환율안정기금(ESF)에서 최대 250억 달러를 쓸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SVB 파산 사태 이후 미 정부가 예금 전액 보호란 비상 조치에 돌입한 것은 뱅크런 도미노가 미국 나아가 글로벌 금융 시스템 전반의 위기로 전이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이번 조치가 13일 오전 아시아 증권시장 개장을 앞두고 나온 만큼 전 세계 증시로 충격이 확산, SVB 사태가 일파만파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한 포석도 있다.
특히 미 당국은 여타 은행으로 예금 인출이 잇따르거나 테크 기업·투자자의 자금이 묶여 경영난이 악화, 다시 뱅크런을 부추기는 악순환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미 정부는 특히 예금주들이 여타 중소 은행에서 연이어 자금 인출에 나설 경우 SVB 사태와 같은 도미노 파산이 잇따를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한다. 실제로 약 40년 전 설립된 SVB가 무너지는 데 걸린 시간은 36시간에 불과했다. 그만큼 위기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위험은 이미 현실화되고 있다. 미 금융당국은 이날 뉴욕에 기반을 둔 시그니처 은행의 영업을 폐쇄했다. 정부는 "뉴욕주 금융당국이 (SVB와) 유사한 시스템적 위험을 고려해 뉴욕 시그니처 은행의 영업을 오늘자로 중단시켰다"고 밝혔다. 가상화폐 산업 주요 은행 중 하나인 시그니처 은행의 총자산은 1104억 달러, 예금은 886억 달러 수준이다. 미 당국은 SVB와 마찬가지로 시그니처 은행 예금주들의 자산도 전액 보호하기로 했다.
일각에선 미 당국이 사실상 '구제금융' 카드를 꺼낸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은 이날 오전 CBS 페이스 더 네이션과의 인터뷰에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언급하며 당시와 같은 대규모 구제금융은 없을 것이라고 일축했다. SVB 파산 충격이 확산될 것이란 우려로 정부 차원의 개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잇따르는 가운데 직접 구제금융 가능성을 일축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미국의 은행 시스템은 정말 안전하고 자본화가 잘 돼 있다"며 "우리는 예금자들을 걱정하고 있고 그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결국 미 재무부가 예금을 최종 보증하는 만큼 구제금융과 관련한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워싱턴포스트(WP)는 "(이 같은 조치가) 구제금융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비판에 직면할 것"이라며 "예금주에게 가는 자금은 미국 은행이 지급하지만 궁극적으로 재무부, 결국 미국 납세자들에 의해 뒷받침된다"고 꼬집었다.
사태가 더 악화되기 전에 미 정부가 개입해 조기 진화해야 한다는 비판 여론도 이번 결정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란 분석이다. 미국 벤처 투자가 데이비드 삭스는 11일(현지시간) 트위터를 통해 "파월과 옐런은 어디에 있나"라며 "월요일 전에 SVB 예금을 상위 4개 은행에 분산 배치하지 않으면 위기가 확산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시장 일각에서는 SVB 사태의 본질이 Fed의 고강도 긴축으로 촉발된 만큼 상황이 비슷한 다른 은행들에도 파장이 닥칠 것이란 경계감이 이어진다. 대다수 미 은행은 미국 국채를 포함한 상당 규모의 채권을 자산으로 보유하고 있다. 옐런 장관 역시 이날 인터뷰에서 "기술 분야의 문제는 이번 사태의 핵심이 아니다"라고 Fed의 급격한 금리 인상이 문제가 됐음을 시사했다.
다만 SVB 사태가 금융 시스템 전반의 위기가 확산될 가능성은 낮다는 전망이 나온다. 애닐 카시얍 시카고대 부스 비즈니스 스쿨 교수는 "은행의 붕괴는 주주들에게 손해를 입히고 예금을 보유한 회사들에게 경제적 문제를 촉발할 수 있지만 2008년 금융위기와 같이 금융 시스템 전반이 위험해질 거란 의미는 아니다"며 "이번 사태는 잘못 관리된 중견 은행의 문제이지 시스템 적인 사건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현재 미국 은행 시스템은 상위 5개 금융기관에 13조 달러의 자산이 묶여 있는 등 고도로 집중화 돼 있다"며 "SVB와 비슷한 규모의 은행이 뱅크런 사태를 겪더라도 금융 시스템 전반은 계속 기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권해영 기자 roguehy@asiae.co.kr
조유진 기자 tin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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