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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人사이드]"꿈이 인생을 만드는 거야" 야구선수 오타니 쇼헤이 이야기

수정 2023.12.22 10:21입력 2023.03.11 09:00

투수·타자 겸비한 '이도류' 괴물
꾸준한 계획과 노력으로 사랑받아

[이미지출처=연합뉴스]

전날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한일전으로 한국과 일본 두 나라가 뜨겁게 달아올랐습니다. 한국을 열심히 응원하면서도 오타니 쇼헤이의 실력에 놀라곤 했는데요, 출전 소식에 경기 전부터 세간의 관심이 쏠린 선수기도 하죠. 오늘은 일본 최고 주가를 달리는 야구선수 오타니 쇼헤이의 이야기를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큰 키는 유전...어릴 때부터 재능 보여

오타니는 1994년 7월 5일생으로 일본 이와테현 출신입니다. 사실 오타니가 정상급 선수로 크게 된 것에는 부모님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을 거 같습니다. 부모님이 모두 운동을 했던 '스포츠 수저'인데, 아버지는 사회인 야구선수 출신이고 어머니도 배드민턴 선수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서는 오타니의 큰 키가 항상 주목받곤 하는데, 그의 190cm가 넘는 큰 키는 180cm인 아버지, 170cm인 어머니에게서 왔다고 하네요.


오타니가 야구를 시작하게 된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라고 합니다. 친구가 권유를 해서 함께하게 됐습니다. 야구 선수 출신 아버지 덕분에 집에서 캐치볼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친구와 야구부에 들어가 연습에 참여하니 또 다른 재미를 느꼈다고 하는데요. 부모님에게 리틀야구단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씀을 드렸고, 이때부터 야구선수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리틀야구단에서는 투수부터 외야수까지 다양한 포지션을 경험하며 프로야구 등판을 꿈꾸게 됩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이미 구속 110km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이는 중학생 중에서도 에이스 선수들이 던지는 속도라고 하네요. 재능을 보인 오타니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일본의 전국 고교야구 대회인 고시엔에 출전해 구속 150km를 기록합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지방 예선에서 구속 160km를 던졌는데, 웬만한 프로야구 선수와 맞먹는 레벨이죠.


일본의 여러 프로 구단들은 오타니를 주목하기 시작하고, 홋카이도의 니혼햄 파이터스가 오타니를 영입합니다. 이때 투수와 타자 모두 가능한 ‘이도류’로 등장만으로 상대방에게 위압감을 주는 선수로 자리매김합니다. 사령탑이었던 쿠리야마 감독은 그의 성장에 많은 힘을 보태면서 메이저리그 진출을 적극 권유합니다.

2017년 LA에인절스로 이적한 그는 발목부상으로 한 차례 WBC 참가를 건너뛰었지만, 2018년 첫 메이저리그(MLB)에서 아메리칸리그 신인왕을, 2021년에는 MVP를 거머쥐게 됩니다. 오타니의 이도류로 미 프로야구와 WBC에는 투타 겸업 선수가 선발 투수로 나온 뒤에는 교체돼도 타자로 라인업으로 남아있을 수 있다는 ‘오타니 룰’이 만들어지기도 하죠.


[이미지출처=연합뉴스]
철저한 계획과 실천...日에서도 유행한 ‘오타니 계획표’

오타니의 이러한 승승장구에는 엄청난 노력이 뒤따랐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인기는 더욱 치솟았습니다. 특히 그는 꼼꼼하게 인생 계획을 세우고 이를 매일 꾸준하게 실천하는 것으로 유명한데요. 일본에서는 이른바 ‘오타니 계획표’로 불리는 ‘만다라트’가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연꽃 모양으로 아이디어를 사방으로 개발해 목표와 계획을 작성하는 것인데, 오타니도 고등학생 때 감독에게 전수받아 이를 실천했다고 하죠.


오타니가 직접 작성한 계획표.

눈에 띄는 것은 몸 만들기, 하체 강화, 구속 높이기 등 야구에 관련된 것뿐만 아니라 쓰레기 줍기, 인사하기, 물건을 소중히 쓰기, 일희일비 하지 않기 등의 것들도 계획에 넣어 실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타니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누군가가 버린 운을 줍는다는 생각으로 구장에 떨어진 쓰레기 등을 줍곤 한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그의 명언도 많은 사람들에게 열정을 불어넣었는데요, “인생이 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꿈이 인생을 만드는 것”이라는 말이 특히 많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야구 사랑이 대단한 일본에서도 ‘열정맨’으로 추앙받는 오타니. 아마 운동뿐만 아니라 그의 모나지 않은 인성도 야구팬들의 사랑을 끌어들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전진영 기자 jintonic@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정치 그날엔]영화 대외비, 해운대 조진웅은 실화일까
수정 2023.12.21 10:25입력 2023.03.11 09:00

해운대의 아들로 등장한 지역 정치인
1992년 제14대 총선, 부산 해운대 배경
민자당 해운대 승리, 무소속 출마후보는 없어

편집자주‘정치, 그날엔…’은 주목해야 할 장면이나 사건, 인물과 관련한 ‘기억의 재소환’을 통해 한국 정치를 되돌아보는 연재 기획 코너입니다.

“이 해운대의 아들 전해웅이가….”


영화 ‘대외비’는 1992년 제14대 총선 당시 부산 해운대구에서 벌어진 일을 배경으로 한다. 지역 정치인 조진웅(전해웅 역)이 부산에서 공천만 받으면 당선된다는 정당의 공천을 사실상 받았다가 빼앗기는 과정. 이를 만회하고자 거대한 음모에 스스로 휘말리는 게 영화의 뼈대다.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에 따르면 9일 현재 대외비는 누적관객수 57만여 명으로 3월 박스오피스 1위다. 권력을 놓고 벌이는 검은 거래의 실체, 정치인과 조폭 그리고 언론의 뒷거래 등 대중의 관심을 끌 요소가 녹아 있는 영화다.


흥미로운 점은 1992년 제14대 총선, 그것도 부산 해운대구라는 특정 지역의 출마 후보를 둘러싼 에피소드가 영화 스토리의 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전해웅을 연기한 배우 조진웅. 정말로 조진웅이 영화에서 언급한 것처럼 해운대의 아들, 그는 14대 총선에 출마했을까.

영화에서도 배경 설명으로 나오지만 1992년은 특별한 해다.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 선거가 같은 해 치러졌다. 그때까지 국민 투표를 통한 정권 교체가 한 번도 없었던 대한민국 정치. 당시 권력은 총선 승리를 토대로 12월 대선까지 승리하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었다.


총선 승리는 그래서 더 중요했다. 삼당야합이라는 비판을 받으면서까지 민주자유당(민자당)을 창당한 것도 1992년 대선을 위한 큰 그림이었다. 실제로 1992년 3월24일 제14대 총선이 열렸다.


부산도 당연히 총선의 열기가 뜨거웠다. 영화에서 나온 것처럼 해운대에서도 새로운 국회의원을 뽑기 위한 경쟁이 벌어졌다. 당시 부산에서는 ‘민자당 공천=당선’이라는 공식이 형성될 정도로 집권 여당인 민자당의 강세가 두드러졌다.


해운대의 아들이라는 전해웅이 공천을 받고자 하는 정당은 민자당일 가능성이 높다.


제14대 총선 부산 해운대구에서는 4명의 후보가 나왔다. 민자당에서는 김운환 후보, 민주당 최달웅 후보, 통일국민당 이병희 후보, 민중당 이동환 후보 등 4명이다. 영화에서는 기호 1번 정당 후보 공천을 받으려 했던 전해웅이 석연치 않은 공천 탈락으로 무소속으로 출마한다.


하지만 현실의 14대 총선 해운대구 선거에서는 무소속 후보가 단 한 명도 없다. 그렇다면 해운대구 선거에서 당선자는 누구일까. 공천만 받으면 당선된다는 그 가정은 현실이었을까.


제20대 대통령선거를 하루 앞둔 2022년 3월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청운효자동 자치회관에서 종로구청 직원이 기표 도장을 들어 보이고 있다./김현민 기자 kimhyun81@

현실도 그러했다. 민자당 김운환 후보는 해운대구에서 6만1013표, 득표율 51.74%로 당선됐다. 2위인 민주당 최달웅 후보가 28.21%를 얻은 것을 고려할 때 일방적인 승부였다. 영화에서는 전해웅이 무소속 돌풍을 일으키면서 여론조사에서 앞서가는 등 이변을 연출하는 듯 보였지만, 현실의 해운대구 선거에서는 민자당의 압승으로 끝이 났다.


정치인 김운환은 3선 국회의원 출신이다. 1988년 제13대 총선에서 정치인 김영삼이 이끄는 통일민주당 전국구(현재의 비례대표)로 출마해 첫 금배지를 달았다. 1992년 제14대 총선은 민자당 후보로 부산 해운대구에 출마해 첫 지역구 국회의원이자 재선 의원이 됐다.


1996년 제15대 총선에도 신한국당 후보로 부산 해운대·기장군갑에 출마해 49.15% 득표율로 3선에 성공했다. 1990년대 해운대의 맹주로 커왔던 정치인 김운환은 1997년 대선을 거치면서 정치 풍랑을 경험했다.


정치인 이인제의 국민신당에 참여했던 김운환은 대선 이후 진행된 합당 과정에서 새정치국민회의 소속이 됐다. 그렇게 정치인 김운환은 집권 여당(새정치국민회의) 부산광역시지부장 자리를 맡게 됐다.


집권 여당의 주요 자리를 차지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정치 생활을 순탄치 않았다. 2000년 제16대 총선에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부산 해운대·기장군갑 지역구에 출마했지만 21.45%라는 저조한 득표율로 낙선하며 여의도 정치 무대에서 조용히 사라져갔다.




류정민 기자 jmry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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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찐비트]'칸막이에 불규칙 배열도'…재택근무시대 '사무실'의 미래는[오피스시프트]⑪
수정 2023.03.11 12:00입력 2023.03.11 12:00

17세기부터 생겨 19세기 산업혁명 이후 확산
현대 사무실 역사에서 대성공 거둔 큐비클

편집자주[찐비트]는 '정현진의 비즈니스트렌드'이자 '진짜 비즈니스트렌드'의 줄임말로, 일(Work)의 변화 트렌드를 보여주는 코너입니다. 찐비트 속 코너인 '오피스시프트(Office Shift)'는 코로나19 팬데믹을 계기로 시작된 사무실의 변화를 꼼꼼히 살펴보고 그동안 우리가 함께해온 실험을 통해 업무 형태의 답을 모색하기 위한 바탕을 마련하는 콘텐츠가 될 것입니다. 매주 토·일요일 오전 여러분 곁으로 찾아갑니다. 40회 연재 후에는 책으로도 읽어보실 수 있도록 할 예정입니다.

"유령도시 같다."


대표적인 빅테크 기업 구글의 순다르 피차이 최고경영자(CEO)가 최근 직원들과 만나 이렇게 말했다. 코로나19로 재택근무를 경험한 직원들이 사무실로 출근하는 경우가 크게 줄면서 널찍한 책상이 곳곳에 비어있는 상황을 표현한 말이었다. 피차이 CEO는 "현재 공간을 비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자원을 잘 관리해야 한다"면서 주 4일 이상 사무실로 나오는 인력은 전체의 3분의 1 수준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유령도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글이 내놓은 대책은 무엇이었을까.

구글의 순다르 피차이 최고경영자(CEO) [이미지출처=로이터연합뉴스]

CNBC방송 등에 따르면 구글은 지난달부터 '하이브리드 근무(사무실 출근과 재택근무의 결합)'하는 직원들이 서로 출근하지 않는 날에 엇갈려 같은 책상을 사용하는 정책을 도입한다고 발표했다. 일부 직원의 주 3일 사무실 출근 방침을 주 2일로 바꾸고, 2명을 한 조로 배정해 같은 책상을 사용하라는 지시였다. 월·수요일에 사무실로 나오는 직원은 화·목요일 출근자와 같은 책상을 쓰는 식이다. 회사 전체 직원의 25%에 해당하는 직원들이 실험 대상이 됐다.


코로나19가 사무실의 모습을 바꿔놓았다. 재택근무와 하이브리드 근무라는 새로운 근무 환경과 경기 둔화라는 상황이 사무실 변화에 녹아들었다.

사무실은 한마디로 사무 업무를 위한 전용 공간이다. 생산성 향상이라는 목표 아래 시대와 가치에 따라 모습이 변한다. 사무실은 적게는 여러 명, 많게는 수만 명까지 모여 일정 시간을 함께하는 공간인 만큼 다양한 주체의 요구가 한자리에 모여 변화를 만들어낸다. 특히 사무실을 마련한 회사와 이를 이용하는 직원의 소통과 가치 충돌이 사무실에 오롯이 담긴다.

◆ 사무 전용 공간은 언제 처음 등장했나

사무실은 언제 처음 등장했을까. 먼저 사무실의 영어단어 '오피스(Office)'는 '일(work)'을 뜻하는 라틴어 '오푸스(opus)'와 '하다(do)'라는 의미의 라틴어 '파세레(facere)'가 합쳐진 라틴어 '오피시움(officium)'에서 유래한 것으로 전해진다. 오피시움은 현재 사용되는 사무직을 위한 전용 공간이라기보다는 고대에 사제들이 의식을 행하는 것을 포함해 폭넓은 의미에서 일하는 공간을 지칭하는 표현이었다고 한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사무실처럼 사무를 위한 전용 공간 개념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부터 다. 미 경제 전문 매체 패스트컴퍼니에 따르면 비톨드 리브진스키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는 1987년 내놓은 책 '집 : 아이디어의 짧은 역사'에서 과거 재택근무를 했던 변호사, 공무원을 비롯한 전문직 종사자들이 런던이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프랑스 파리 등에서 사무실 근무를 시작했다고 했다.

영국 구 왕립해군 본부 건물(사진출처=영국 정부 홈페이지)

그렇게 등장한 영국 최초 사무 전용 건물이 바로 1726년 대영제국의 수도 런던에 있는 구 왕립해군 본부 건물이다. 당시 이 사무실은 왕립해군의 서류 작업을 처리하는 공간이자 회의 공간으로 활용됐다. 뒤이어 1729년에는 영국 동인도회사가 당시 식민지였던 인도와 관련한 업무를 보는 본부를 런던에 세웠다. 처리해야 할 서류량이 많아지면서 이를 처리해야 할 중앙집중식 공간이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 부편집장이었던 루시 켈러웨이가 2013년 BBC방송에서 보도한 기사에 따르면 당시 동인도회사 직원이었던 17살의 찰스 램은 "금요일 아침 10시부터 밤 11시까지 사무실에 있었다. 어제는 밤 9시까지 일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인도에서 서류가 넘어오면 일이 한꺼번에 몰려 야근이 불가피했다는 것이 켈러웨이의 설명이다. 18세기에도 현대 직장인과 마찬가지로 직장인들은 야근에 고통받고 있었다.

1796년 영국 동인도회사 런던 본부의 모습(사진출처=대영도서관 홈페이지)

1854년에는 영국 정부의 공식 문건에도 사무실이 필요하다는 요청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알렉시 마모트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 교수는 2015년 영국 정부 공식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이 일화를 소개했다. 1840년부터 1859년까지 영국의 사무차관을 지냈던 찰스 트리벨리언 경이 1854년에 남긴 한 기록에는 "사무 업무를 위한 분리된 공간이 필요하다. 그래야 '머리로 일하는 사람(a person who works with his head)'이 방해를 받지 않는다"면서 "다만 적정한 관리하에 여러 직원이 한 공간에서 협력해 일하는 것이 적절한 방식"이라고 적혀있었다.

◆ 생산성 극강 '테일러리즘' vs 자율성 살린 '뷰로란트샤프트'

현대 사무실이 본격적으로 확산한 건 19세기 산업혁명 이후다. 금융, 인프라 등 각종 산업이 빠르게 발전, 성장하면서 관련 서류 작업을 할 일이 급증했다. 사무원이 대폭 늘었고 회사는 조직 관리 차원에서 이들을 한곳에 모아둘 필요성이 커졌다. 현대 사무실의 등장과 함께 초기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두 개념이 바로 '테일러리즘(Taylorism)'과 '뷰로란트샤프트(Burolandschaft)'다.


테일러리즘은 1910년대 미국의 기계 엔지니어이자 경영학자였던 프레데릭 테일러가 만든 과학적 관리 기법으로,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것이 핵심이다. 직원과 공간의 효율성을 끌어올리고 비용은 줄여 이익 극대화에 초점이 맞춰졌다. 테일러는 자신의 저서 '과학적 관리법'을 통해 근로자의 동선이나 작업 범위 등을 표준화해 노동 생산성을 높이는 방안을 제시했다. 동시에 관리자가 모두를 지켜볼 수 있는 개방형 사무실이었다.


테일러리즘의 가치를 담은 사무실의 모습은 마치 바둑판 같다. 당시 사무실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나 그림을 보면 칸막이 하나 없이 개방된 넓은 공간에 책상이 일렬로 빼곡히 들어서 있고, 빈틈을 최소화해 가능한 한 많은 책상이 배치돼 있다. 테일러는 책에 "과거에는 사람이 먼저였다. 미래에는 시스템이 최우선이 돼야 한다"고 적었다. 효율성과 생산성에만 집중한 사무실은 비인간적인 작업 환경이라는 지적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사무실의 환경은 1950년대에 크게 변한다. 대공황과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은 유럽에서 먼저 시작된 변화였다. 1958년 독일의 에버하드·볼프강 슈넬레 형제가 사무실 풍경이라는 뜻의 독일어 뷰로란트샤프트라는 개념을 내놨다.


2014년 책 '큐브 : 일터의 비밀스러운 역사'를 쓰고 현재는 미국 민주당 소속 펜실베이니아주 상원의원인 니킬 사발이 2015년 뉴욕타임스(NYT) 기고문으로 설명한 내용을 보면 당시 슈넬레 형제는 테일러리즘 스타일의 사무실이 '케케묵은 구식에 쓸모없는 형태'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들이 생각한 사무실은 원활한 소통이 이뤄지고, 유기적이며 모든 것이 맞물려 돌아가는 공간이어야 한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1975년 뷰로란트슈타트 스타일의 한 영국 사무실(사진출처=런던대 브리티시히스토리 홈페이지)

테일러리즘을 기반으로 한 사무실이 직선 형태로 구성됐다면 뷰로란트샤프트 개념을 탑재한 사무실은 곡선 형태를 띤다. 두 형태 모두 개방형 사무실이라는 점은 같았지만, 테일러리즘 사무실과는 달리 뷰로란트샤프트 사무실은 불규칙하게 공간을 구성하고 각 책상 사이에는 식물을 배치해 공간을 분리하도록 했다. 이를 통해 유연성과 자율성을 높였다.

◆ 대성공 거뒀지만 정작 발명가에 버림받은 '큐비클'

1960년대 들어 등장한 큐비클은 현대 사무실의 역사에서 대성공을 거두면서 동시에 엄청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사무실 형태다. 큐비클은 1~2m 높이의 칸막이 3개로 사무직 직원의 양옆과 앞을 막아 동료와 업무 공간을 분리해 하나의 작은 업무 공간을 만드는 일종의 가구다. 직원 한 사람이 작고 네모난 공간에 들어가 있는 형태로, 국내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큐비클은 1960년대에 개방형 사무실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등장했다. 미국 사무용 가구 회사였던 허먼 밀러의 컨설턴트인 로버트 프롭스트가 만든 일종의 가구 '액션 오피스'가 바로 큐비클로 연결됐다. 당시 프롭스트는 개방형 공간이 직원 간의 소통을 오히려 줄인다고 보고, 때로는 프라이버시를 보장하면서 동시에 협업도 가능하도록 가구로 공간을 구성하는 방식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이를 통해 직원 개인의 자율성도 확보하고 다양한 업무 환경을 구성할 수 있는 능력도 제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프롭스트가 만든 액션 오피스에 가성비를 더한 '액션 오피스2'인 큐비클은 출시 직후 대성공을 거뒀다. 사발이 WSJ에 소개한 바에 따르면 큐비클은 1985년 세계 디자인 콘퍼런스에서 25년 내 가장 성공한 디자인으로 평가됐다. 또 1998년 4000만명의 미국 직장인이 42개 버전의 액션 오피스2에서 근무했다고 한다. 프롭스트가 '큐비클의 아버지'라는 명칭까지 받게 된 이유였다.


하지만 프롭스트는 정작 2000년 본인이 사망하는 그 순간까지 큐비클이 활용되는 모습을 보며 한탄했다고 한다. 프롭스트의 의도와 달리 기업들은 부동산 가격이 치솟고 사무직원 채용이 급증하자 사무실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큐비클을 비용 절감 수단으로 썼다. 테일러리즘 사무실처럼 큐비클이 연달아 일렬로 배치된 일명 '큐비클 농장(cubicle farm)'에서 직원들은 불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미 유력 매체 포천은 2006년 큐비클을 두고 '대실수(The Great Mistake)'라고 표현하며 비판했다.


WSJ에 따르면 프롭스트는 자신이 죽기 2년 전인 1998년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그는 "이것(큐비클)의 어두운 부분은 모든 조직이 똑똑하고 진보적이지는 않다는 데 있다. 많은 경우 같은 도구를 가져다가 아주 기분 나쁜 것을 만들어낼 무지한 인물들이 이용한다는 것"이라면서 "그들은 아주 좁은 방을 만들고 거기에 사람들을 쑤셔 넣었다"고 슬퍼했다.




정현진 기자 jhj48@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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