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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레이트]스릴러를 떨어뜨렸을 뿐인데…

수정 2023.03.05 19:29입력 2023.03.05 17:52

현실적 공포에 무게 두지만 논리적 필연성 약해
안이한 스마트폰 해킹 대처, 흐릿한 범죄 목적
피해자 복합적 감정도 하나로 연결하지 못해

※ 이 기사에는 영화 스포일러가 될 만한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넷플릭스 영화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는 스마트폰 범죄를 다룬 스릴러다. 평범한 시민을 범죄로 끌어들이고 일상을 무너뜨린다. 김태준 감독은 미스터리 설정을 과감히 포기했다. 범인이 우준영(임시완)이란 사실을 초반에 밝히고, 피해자 이나미(천우희)와 가까워지는 과정을 그린다. 접근은 지속적이고 반복적이다. 우연을 가장한 스토킹으로 현실적 공포와 분노에 무게를 둔다.



스릴러 특유 긴장감이 유발되려면 논리적 필연성과 당위성이 뒷받침돼야 한다.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의 기반은 그다지 튼튼하지 않다. 우준영은 살인을 시도하기까지 이나미를 네 차례 마주한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만남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 스마트폰에서 이미 많은 정보를 습득한 터라 음험한 탐색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감정적 교류만 두드러져 박진감이나 조바심 생성을 저해한다. 후자에서는 작위성도 드러난다. 다음 만남에서 이나미와 절친 정은주(김예원)를 이간질할 걸 미리 알기라도 한 듯 조작한 명함을 건넨다. 그날 밤 정은주가 이나미 집을 찾아 하룻밤을 묵은 건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부자연스러운 이야기에는 별다른 특이점도 없다. 크게 두 가지 요소에서 차별화에 실패했다. 이나미의 안이한 스마트폰 해킹 대처와 우준영의 흐릿한 목적성이다.

순진하고 어리숙한 피해자

초반 그려진 이나미는 스마트폰 없이 살 수 없는 현대인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동질감을 유발해 현실적 공포를 전하겠다는 야망이 엿보인다. 그런데 스마트폰 분실 뒤 이나미의 대응은 지극히 수동적이고 소극적이다. 잃어버린 스마트폰의 액정이 깨져 있고 이를 무상으로 수리받는데도 의심하는 눈초리가 전혀 없다. 며칠 뒤 우준영으로부터 자세한 설명을 듣고도 그날을 의심하지 않는다.



"혹시 평상시보다 배터리가 좀 빨리 닳고 그랬나요?" "어, 맞아요. 엄청나게 빨리 닳았어요." "이거 스파이웨어 깔린 거 맞네요." "그게 정확히 어떤 거예요? (…) 아, 근데 제가 최근에 뭐 설치하거나 한 게 없는데 어떻게 깔린 거예요?"


이나미는 우둔하기도 하다. 우준영이 정은주와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하는 거짓말의 허점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다. "나미 씨 말대로 (스파이웨어를) 다운받은 흔적이 없어요. 이게 무슨 말이냐면 누군가가 나미 씨 폰에 몰래 직접 설치를 했다는 말이죠. 그리고 이 파일 자체도 위치 추적이랑 도청이 목적이라서 원격 조종은 못 하거든요." "무슨 말씀이신지…." 이나미는 원격조정을 할 수 없다는 말만 되뇐다. 정은주가 설사 일을 벌였더라도 굳이 스파이웨어를 깔 필요가 있는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존재감 부족한 범죄자

우준영은 얼핏 보기에 교묘하고 치밀하다. 많은 사람을 살해하고도 꼬리를 밟히지 않았다. 하지만 이나미를 꾀어내는 과정은 대담하다 못해 노골적이다. 폐쇄회로(CC)TV 등을 신경 쓰지 않고 얼굴을 과감하게 드러낸다. 이나미를 만나는 장소는 매번 같은 카페이고, 네 번째 만남에는 정은주도 함께한다. 의도대로 살인을 추가한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용의선상에 오를 수밖에 없다.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범죄를 저지른다면 그만한 당위성이 있어야 한다. 우준영에게서 별다른 동기는 보이지 않는다. 금전이나 성적 쾌락에 무관심하다. 또 다른 범죄에 악용할 생각도 없다. 그저 반사회성 성격을 지닌 사이코패스다. 타인에게 전달되는 고통을 즐기기 바쁘다. 김태준 감독은 이 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이유를 열거하지 않는다. 시청자가 사이코패스라고 유추하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묘사한다. 편의적으로 빚어낸 배역에서 '추격자(2008)'의 지영민(하정우) 같은 존재감이 나올 리는 만무하다.


우준영은 살인을 시도하는 모습도 밋밋하다. 이나미가 수동적으로 요구를 따라줘서 시종일관 침착함을 유지한다. 절정에 배치되고도 스마트폰 해킹에 의한 피해만큼 긴장을 유발하지 못하는 이유다. 일련의 과정은 스마트폰 범죄에 대한 통찰로도 이어지지 않는다. 그저 여타 스릴러 영화가 보인 진부한 표현과 흐름을 반복할 뿐이다. 뒤늦게 내세우는 이나미의 능동성 회복은 탄력을 받을 리 없다. 아버지 이승우(박호산)가 볼모로 잡힌 모습을 보고 억눌리는 전개부터 부자연스러웠다.


여러 토막으로 잘린 복합 감정

아버지 자택의 욕실 신이다. 이나미는 창처럼 길고 뾰족한 도구를 들고 우준영을 공격하려 한다. 하지만 물이 담긴 욕조에 포박당한 아버지와 그의 목에 칼을 겨눈 우준영을 확인하고 찌르기를 주저한다. 이내 도구를 내려놓고 스스로 두 발목을 테이프로 묶는다. 그는 우준영이 수도를 틀어 아버지가 익사할 위기에 처하자 욕설을 퍼지르며 발악한다. "야, 이 X새끼야. 내가 죽여버릴 거야. 이 X새끼야." 우준영이 수도꼭지를 잠그고 아버지의 머리를 들어 올리자 절규는 애원으로 바뀐다. "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요. 시키는 대로 뭐든 할 테니까 아빠는 풀어주세요."



천우희는 분하고 억울하고 슬프고 못마땅한 얼굴을 모두 보여준다. 그런데 각각의 감정은 하나로 연결되지 않는다. 김 감독이 컷으로 잘게 쪼개서 편집했기 때문이다. 아버지 클로즈업 샷과 우준영 클로즈업·웨스트·바스트 샷을 사이사이에 끼워 넣어 흐름이 끊긴다. 복잡한 심경보다 개별적인 리액션 모음으로 나타난다.


'올드보이(2003)'에서 미도(강혜정)에게 비밀을 알리려는 이우진(유지태) 앞에서 용서와 협박을 오가는 오대수(최민식)와 대조적이다. 박찬욱 감독은 핸드헬드로 최민식의 연기에만 집중해 벼랑 끝에 몰린 남자의 최후를 효과적으로 전한다. "너! 머리털 끝부터 발톱까지 이 지구상 동서남북 어디서도 네 시체를 찾을 수 없을 거야. 왜? 내가 잘근잘근 씹어 먹을 테니까. 우진아. 이우진 씨! 내가 잘못했다. 내 이 말 취소한다. 제발, 취소해, 부탁이야."


'올드보이' 연출이 정답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때로는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가 추구하는 방향이 효과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방식이든 단조로운 서사와 비논리성까지 감싸기는 불가능하다. 그 소재가 모두에게 익숙한 스마트폰이라고 할지라도.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정치X파일]"라떼는 국회가"…이순재·최불암·강부자
수정 2023.03.05 12:00입력 2023.03.05 12:00

⑦1992년 총선, 유명 연예인 국회의원 당선
이순재·이주일, 지역구…최불암·강부자, 전국구
길지 않았던 의정경험, 여의도 떠나 친정으로

편집자주‘정치X파일’은 한국 정치의 선거 결과와 사건·사고에 기록된 ‘역대급 사연’을 전하는 연재 기획물입니다.

2023년 현재, 최고의 인기 연예인인 BTS나 임영웅이 선거에 출마한다면 어떻게 될까. 엄청난 화제를 몰고 오면서 단숨에 선거의 관심을 독점하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특정 정당 소속으로 출마하는 것 자체가 가수나 배우들에게는 위험 요인이다. 정치색이 덧씌워지는 순간, 경쟁 정당 지지자들은 등을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유명 연예인들의 출마 얘기를 농담으로만 여길 수 없는 이유는 지난 대선에서도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당사자의 의사와 무관하게 특정 연예인 영입 문제가 관심의 대상으로 떠올랐고, 이를 둘러싼 관심이 뜨거웠다. 만 40세가 되지 않은 연예인은 대선 출마 자격 자체가 없기 때문에 처음부터 가능하지 않은 시나리오였다.


사실 한국 정치에서 유명 배우나 가수가 선거의 변수로 등장한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지금도 중요한 선거운동을 하게 될 경우 평소 친분이 있는 연예인들이 찬조 출연하는 경우가 많다. TV에서 보던 얼굴을 유세 현장에서 보면 대중은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배우 이순재가 2018년 3월 14일 오전 서울 중구 메가박스 동대문점에서 열린 영화 '덕구' 제작보고회에서 취재진의 질문을 듣고 있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정당 입장에서는 흥행 보증 수표다. 그렇다면 유세장에서의 바람잡이 역할에 머물지 않고, 직접 출마하는 경우는 없을까. 이른바 ‘삼김 정치’ 시대가 이어지던 1992년 3월24일 제14대 총선에서는 당시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만한 배우들이 직접 출마해 화제를 일으켰다.


주인공은 이순재, 최불암(본명 최영한), 이주일(정주일), 강부자 등이다. 1934년 북한 회령 출신인 배우 이순재는 서울 중랑구갑 지역구에 민주자유당(민자당) 후보로 나섰다. MBC 주말연속극 ‘사랑이 뭐길래’에서 대발이(최민수) 아버지로 나와 장년층의 폭넓은 인기를 끌었던 시기다.


이순재 후보는 4만6297표(득표율 48.71%)를 얻으면서 민주당 이상수 후보(44.75%)를 꺾고 당선됐다. 중랑구는 당시 민주당 강세 지역이었는데 이순재 후보의 국민적인 인기를 토대로 민자당에 승리를 안겼다.


제14대 총선에서는 또 한 명의 유명 연예인 출신 국회의원이 탄생했다. 코미디계의 전설 이주일이다. 1940년 강원도 고성에서 태어난 그는 본명인 정주일이라는 이름으로 통일국민당(국민당) 후보로 경기 구리시 국회의원에 도전했다. 2만5751표(45.34%)를 얻어 민자당, 민주당 후보를 모두 꺾고 당선됐다.


1992년은 전원일기의 영원한 회장님, 배우 최불암도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해다. 1940년 인천에서 태어난 그는 최영한이라는 본명으로 국민당 전국구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최불암은 전국구 5번으로 당선됐는데, 당시 국민당 전국구 3번이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었다.


2018년 10월 15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초록우산어린이재단 창립 70주년 기념식에서 전국후원회장인 배우 최불암 씨가 발언하고 있다. /문호남 기자 munonam@

역대 총선 가운데 제14대 총선이 특별한 이유는 탤런트와 코미디 영역에서 최고의 자리에 있던 인물이 한꺼번에 국회의원에 당선됐다는 점이다. 14대 총선은 대선과 총선이 1992년, 같은 해에 열린 관계로 어느 때보다 정치에 관한 관심이 뜨거웠던 시기다.


이순재, 최불암, 정주일 의원이 한꺼번에 국회 본회의장에 올랐던 제14대 국회. 또 한 명의 유명인이 국회의원으로 합류했다. 1941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난 배우 강부자다. 그는 대선을 거치면서 전국구 의원이 사임한 자리를 물려받아 국민당의 새로운 전국구 의원이 됐다. 총선 때는 당선의 기쁨을 맛보지 못했지만, 결국 제14회 국회의원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정치에 합류한 유명 연예인들의 고민은 높은 관심만큼이나 부담감도 크다는 점이다. 다른 의원들보다 더 많은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고, 작은 실수도 더 크게 부각되는 경우가 많다. 뜻한 바가 있어서 정치를 더 이어가려고 해도 현실의 벽은 만만치 않았다.


최불암은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서울 영등포구을 지역구에 도전했지만 3만3020표(32.49%)의 득표율에 머물면서 낙선했다. 당시 최불암(후보 이름 최영한)을 꺾은 인물은 현재도 국회의원인 김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다.


1996년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출마한 김민석 의원은 4만9657표(득표율 48.87%)를 얻어 당선됐다.


“배우나 가수가 정치를 잘하면 얼마나 잘하겠어?”라는 대중의 편견 속에 의정활동을 이어갔던 유명 연예인들. 국회의원이 될 때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그들이 정계에 뿌리를 내리기는 쉽지 않았다.


유명 연예인 출신 의원들은 현실 정치의 높은 벽에 더해 친정인 방송 연예계 쪽의 러브콜까지 이어지면서 여의도 정가를 떠나 다시 본업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그들의 굵고도 짧았던 의정활동 경험은 마무리됐다.




류정민 기자 jmry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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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in전쟁사]러 용병 '바그너그룹'은 왜 돌격전을 고집하나
수정 2023.03.10 10:38입력 2023.03.05 11:00

4만 명 이상 사상, 러시아군 전술 변화도 촉구
제정 러시아 때부터 '형벌부대' 악명 높아
中 등에서도 고대부터 죄수들 전쟁 동원

편집자주[뉴스in전쟁사]는 시시각각 전해지는 전세계의 전쟁·분쟁 소식을 다각적인 시각으로 알려드리기 위해 만들어진 콘텐츠입니다. '뉴스(News)'를 통해 현재 상황을 먼저 알아보고, '역사(History)'를 통해 뉴스에 숨겨진 의미를 분석하며, 다가올 가까운 미래의 '시사점(Implication)'을 함께 제공해드리겠습니다. 매주 일요일마다 여러분 곁으로 찾아가며, 40회 이후 책으로도 출간될 예정입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 이후 1년을 넘어가면서 러시아군 내 유독 발언권이 강해지는 집단으로 용병기업인 '바그너그룹(Wagner group)'이 꼽히고 있습니다. 이 용병회사의 대표이자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예브게니 프리고진(Yevgeny Prigozhin)의 정계 발언권도 점차 커지고 있는데요.


러시아의 용병기업, 바그너그룹을 이끌고 있는 예브게니 프리고진 대표의 모습.[이미지출처=연합뉴스]

그는 특히 러시아 전역의 교도소에서 중범죄를 저지른 죄수들을 신병으로 모집하면서 우크라이나 전선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개전 이후 벌써 4만명 이상의 사상자가 모두 그가 신병으로 거둔 죄수들이라고 알려질 정도로 많은 죄수들이 응하고 있죠. 총을 들고 조국을 위해 싸우면 그동안의 모든 죄를 사면해준다는 말에 이 죄수부대가 가장 위험한 선봉에 서면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바그너그룹은 함께 싸우고 있는 러시아군에도 더 공격적인 전술을 요구하고 나서면서 러시아 군부에서도 논란이 일고 있죠. 심지어 러시아군이 무능하고 부패했다고 직격탄을 날리면서 전선에서 더 많은 지원을 해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푸틴의 최측근이 뒷배로 있다고 해도 전시에 무리한 요구까지 서슴지 않는 이 용병기업과 죄수부대는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요?

◆뉴스(News) : 바그너그룹, 러시아군에 '돌격대' 작전 제안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한 바그너그룹 본사 건물의 모습.[이미지출처=로이터·연합뉴스]

바그너그룹과 관련한 최근 뉴스를 검색해보면 이들이 우크라이나 전쟁 주요 전선의 선봉에 서있으며, 심지어 러시아군에 작전까지 제안하면서 더 많은 지원을 요구하고 있는 모습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4일(현지시간) 뉴스위크에 따르면 우크라이나군은 최근 러시아군의 전술에 변화가 있음을 느끼고 있으며 이들이 바그너그룹의 전술제안을 일부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습니다. 바그너그룹은 최근 자신들이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활용 중인 전술인 '돌격 분견대 전술(The tactics of the assault detachment)'을 러시아군에 제안했다고 뉴스위크는 보도했는데요.

이 전술은 막대한 희생을 각오하고 전방으로 진격할 돌격대를 따라 전선을 돌파하는 전술로 알려져있습니다. 현재 우크라이나 전선처럼 지난해 9월 이후 수개월간 방어전선이 이미 단단히 구축된 상황에서는 막대한 인명손실이 발생할 수 있는 전술이죠. 실제 바그너그룹은 지난해 2월 개전 이후 현재까지 약 4만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러시아군 전체 사상자의 3분의 1 이상이 바그너그룹의 사상자로 알려질 만큼 엄청난 피해를 입은 바 있습니다.


그럼에도 바그너그룹이 이 전술을 러시아군에 채택하라고 하는 이유는 이대로 전선을 유지한 채 소모전만 벌이면 더 많은 인명이 희생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전쟁의 돌파구를 마련해야 하는 상황에서 오히려 미사일이나 드론공습만 벌이며 전선을 움직이지 않는 러시아군을 바그너그룹과 프리고진 대표는 매우 강하게 비난하고 있는데요.


하지만 러시아 군부 내에서는 오히려 불만이 커지고 있다고 합니다. 러시아 정규군은 모두 징집한 병사들로 병사 한명이 모두 소중한 시민들이지만, 바그너그룹 용병부대는 전체 병력의 20% 정도인 수뇌부와 장교 등을 제외하면 모두 중범죄자들로 구성돼있어 얼마든지 위험한 작전을 벌일 수 있다는 것이죠.

◆역사(History)1 : 2차대전에서 악명 높았던 소련의 '형벌부대'
1942년 구성된 소련의 형벌부대(Penal Battalions)가 전투에 투입된 모습.[이미지출처=russiabeyond.com]

사실 전시에 죄수로 구성된 부대를 보내는 일이 현대에는 흔치 않기 때문에 바그너그룹 용병부대의 모집과 이들의 전투는 전세계 미디어들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에서만큼은 특별한 일로 비춰지진 않는 모습인데요. 그 이유는 19세기 제정 러시아 시대 이후 지금까지 전쟁이 발발할 때마다 '형벌부대(Penal Battalions)'라 불리던 죄수들로 구성된 군대를 많이 동원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러시아에서 처음 이 형벌부대가 등장한 것은 1877년부터 1878년까지 이어졌던 튀르키예와의 전쟁 때라고 하는데요. 이때 병력 부족에 시달리던 러시아군은 시베리아 유형 등을 받던 죄수들을 대상으로 군에 복무하는 대신 형 집행 기간을 단축한다는 조건으로 형벌부대를 만들었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형벌부대가 대규모로 징집된 것은 1942년 나치 독일의 침공을 받던 시기로 알려져있습니다. 당시 이오시프 스탈린 정권은 무차별적으로 진격해 오는 나치 독일군을 막기 위해 징집할 수 있는 모든 남성들을 징집했는데요. 무려 3400만명에 달하는 징집 인원들 중에는 죄수들까지 포함돼있었습니다. 국가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놓여있어서 앞뒤 가릴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죠.


이 형벌부대는 글자그대로 사형수부터 정치범, 살인범, 그리고 단순 절도 등 각종 잡범들까지 러시아 내 모든 죄수들을 끌어모아 만들었다고 합니다. 약 50만명에 달한 이들은 최전선의 가장 위험한 작전에 투입됐고 이들 중 3분의1에 달하는 17만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알려져있죠. 일각에서는 이들의 규모가 지뢰제거, 공수부대 등이 포함된 작전까지 합치면 100만명이 넘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들의 작전은 오늘날 바그너용병부대의 작전과 유사했습니다. 별다른 무장이 없이 형벌부대가 육탄돌격해 돌파구를 마련하고 정예부대들이 이 틈을 이용해 적을 기습하는 방식이었죠. 그러다보니 실제 살아남은 병사들도 많지 않았던데다 전후 소련에서도 일부 뛰어난 전공을 세운 이들을 제외하면 약속대로 사면받은 병사들도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역사(History)2 : 中 고대 진나라 때 이미 등장…고조선 침공에도 동원
중국 고대 진나라 때 병사들의 형상을 본따 만든 조각상들이 남아있는 시안의 병마용갱(兵馬俑坑) 모습.[이미지출처=게티이미지]

이 형벌부대는 사실 중국에서 이보다 훨씬 이전부터 수차례 전쟁에 동원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기원전 209년, 당시 중국 진나라에서 진시황이 사망한 이후 그의 후계자인 호해가 황제가 되자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병력이 부족해진 진나라에서 형벌부대를 만들게 됐다고 합니다.


한나라 때 역사서인 사기(史記)에 따르면 진나라 조정은 당시 장한(章邯)이란 장군에게 수도인 함양 일대에서 부역을 하고 있던 죄수 20만명으로 군대를 만들어 반란군을 토벌하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당시 이 죄수들은 주로 전쟁 노예들로 구성돼 각종 토목공사에 동원된 민간인들이었는데, 장한은 이들을 혹독하게 훈련시켜 전국의 반란군을 토벌하는데 성공합니다.


장한과 진나라 조정은 반란군을 모두 토벌하면 이들의 죄를 사면하고 고향으로 돌려보내준다고 약조합니다. 이 약조를 믿고 죄수부대는 전투를 거치면서 점차 강한 군대로 성장해갔죠. 하지만 이후 진나라 조정에서 반역죄를 무고하게 뒤집어 쓴 장한이 초나라의 항우에게 항복하면서 이들 죄수들은 모두 생매장 당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진나라가 멸망한 이후 들어선 한나라 때도 죄수부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기원전 109년, 한나라의 무제가 위만조선을 공격할 때 5만명의 죄수를 동원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요. 이러한 기록들은 고대 중국에서 전쟁이 발생할 때마다 필요에 따라서 죄수들을 선봉부대로 활용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시사점(Implication) : 인해전술에 승자는 없다
[이미지출처=AP연합뉴스]

러시아 안팎에서는 이러한 형벌부대 동원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작지 않다고 합니다. 결국 이러한 전통적인 돌격작전은 일종의 '인해전술(human wave attack)'로 막대한 병력을 소모하는 방식이기 때문이죠. 결국 선봉에 세울 죄수들이 부족하면 병사들을 앞세워야하고, 병사가 부족해지면 다시 징집에 나서야하는 악순환이 발생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별다른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러시아군은 점차 바그너그룹의 전술에 의지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러시아군은 방어체계를 갖춘 우크라이나군의 역습에 휘말려 개별 전투에서 계속 패배하고 있기 때문인데요.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러시아군은 지난달 약 130대에 이르는 탱크를 잃을 정도로 참패했습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보다 징집 가능인구가 많기 때문에 이러한 소모전이 결국에는 러시아에 유리할 것이란 관측도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 역시 산업현장의 인력난이 심각해 계속 이런 소모전을 하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고 있는데요. 미국, 중국보다 거의 2배 가까운 영토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미국의 절반도 안되는 1억4000만명 정도의 인구를 보유한 러시아 입장에서 인적자원을 대거 잃는 인해전술을 되풀이해 승리하는 것은 결코 승리라 부르기 어렵기 때문이죠.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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