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생기 도는 원전 산업 현장 가보니
경남 창원 원전 협력사 삼홍기계
임금 15% 반납 요청에
"함께 버텨보자" 자진 반납한 직원들
산업부·한수원·두산에너빌 등 선발주에 활기
지난 19일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에 위치한 삼홍기계에서 현장 기술자들이 원전 부품을 제작하고 있다.[아시아경제(창원= 정동훈 기자] "무보수로 일하겠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이 '제 정신이냐', '대표 아들이냐'며 욕까지 했죠. 회사 자금 사정이 어려워져 직원들이 떠난다면 회사에 더 큰 손실이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생산 책임자인 제 월급이라도 반납한 거에요."
◆급여 자진 반납한 직원들, 도산 골짜기 버텨낸 협력사들=경남 창원 원전 부품 제조기업 삼홍기계의 주성만 생산부장은 2021년 7월부터 7개월간 무보수로 일했다. 이 회사 김홍범 대표에게는 "회사가 없으면 월급이 있겠어요? 회사 좋아지면 주세요"라고 말했다. 주 부장은 무보수로 일하는 기간 적금 통장을 해지하고 주식 등 가지고 있던 자산을 팔아 생활비로 썼다.
2021년, 삼홍기계는 원전 정책 후퇴와 코로나19 확산까지 겹악재로 자금 상황이 좋지 않았다. 직원들 인건비를 제때 줄 여력이 없을 정도. 김홍범 대표는 2021년부터 지난해 초까지 1년간 직원들에 15%가량 급여 반납을 요청해야 했다. "주 부장 말고 다른 직원 한명도 '같이 버텨보자'며 월급 30%를 반납했다"며 "고마운 마음에 당시 두 사람을 부둥켜 안고 울었다"고 말했다.
주 부장은 동료 들이 ‘다른 일을 찾아보겠다’ ‘회사를 나가겠다’라고 할 때 “나는 월급 100% 반납하고 있다. 미래가 없다면 내가 이렇게 하겠냐고 설득했다”고 한다. 심리적으로 불안해하던 직원들 가운데 상당수가 그를 믿고 퇴직할 생각을 접었다. 하지만 한때 140명이 넘었던 직원이 100명까지 줄었다. 하지만 서로 믿고 견디고 버틴 결과가 작년 빛나기 시작했다.
지난해 6월 삼홍기계는 원자력 발전 유망 기업으로 선정돼 정부의 에너지 혁신성장 펀드로부터 20억원을 투자 받았다. 당시 김 대표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그간 못 줬던 급여를 돌려주는 것이었다.
지금 1만2540㎡(약 3793평) 삼홍기계 공장에는 용접 불꽃이 튀고 있다. 공장 사람들은 그 불꽃을 보면 마음이 편해진다. 불과 1년전만 해도 공장에는 기계가 공회전하는 소리만 들렸지 불꽃을 볼 수 없었다.
일감이 없어도 녹이 슬지 않도록 하기 위해 기계만 돌렸다. 지난 6월 이후 직원도 10여명 가량을 새로 뽑았다. 올해도 신입 직원 채용을 준비중이다.
지난 19일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에 위치한 삼홍기계의 김홍범 대표가 다시 활기를 되찾은 현장을 안내하며 웃어 보이고 있다.◆용접 불꽃·신규 채용…생기 도는 원전 생태계=원전 기업에 '볕'이 들고 있다. 지난 정부 원전 정책 후퇴로 인해 말라 죽어가던 중소 원전기업이 살아나고 있다.
많은 기업들이 다시 20~30대 신입 직원들을 뽑고 기술을 가르친다. 산업통상자원부·한국수력원자력의 일감 조기 발주와 금융지원 등이 생태계 복원의 '마중물'이 됐다. 원전 분야 선두주자인 두산에너빌리티 등이 선발주를 통해 협력 기업들의 부활을 거들고 있다. 삼홍기계는 지난해 한수원으로부터 19억원, 두산에너빌리티로부터 10억원 규모 일감을 선발주 받았다. 지난해 원전 분야 실적(29억원)은 2021년(약 6억원)과 비교해 5배 가까이 늘었다.
원전 주기기 제관·용접 전문 기업인 원비두기술도 활력을 찾았다. 신한울 3·4호기 주기기 일감 중 원자로 냉각제계통 파이프를 제작하는 원비두기술은 지난해 12월 사전 발주 받은 일감 덕에 오랜만에 공장에 생기가 돌았다. 박봉규 원비두기술 대표는 "신한울 3·4호기 일감이 나온 것 자체가 기업경영에 희망을 주는데, 수주 계약서를 가지고 대출을 연장해 자금난을 이겨냈다"고 말했다. 또다른 원전 부품 업체인 고려정밀공업은 지난해 11월, 원전 협력업체 대상의 동반성장협력대출을 통해 8억원 가량을 저리 대출을 받아 인건비 지급과 재료 구입 등에 힘을 보탤 수 있었다.
한때 국내 원전 산업 경쟁력은 세계 최고였다. 설계부터 뿐만 아니라 건설·제조 분야 생태계를 구축해 놓은 덕분이다. 경남 창원·부산 일대에는 원전 구축에 필요한 파이프·펌프·밸브·탱크 등 각종 원전 관련 부품을 공급할 수 있는 중소 협력사들이 촘촘히 들어서 있다.
한국 원전 산업의 강점인 '온타임 온버짓(On time On budget·정해진 예산으로 적기에 시공)' 시공은 이런 중소기업들이 한수원·두산에너빌리티 등과 팀을 이뤄 만들어 낸 성과다. 한국은 2009년 수주한 UAE 원전을 프랑스·미국의 절반 비용으로 정해진 기일 내에 건설해 경쟁력을 증명했다.
◆에너지 전환기, 원전 수출·차세대 SMR 제조 활기 기대=하지만 국내 원전 건설 중단과 기존 원전의 조기 폐쇄 등 원정 정책 변화로 이런 생태계가 사라질 위기를 겪었다. 국내 원자력 공급 산업체의 매출은 2016년 5조5000억원에서 2019년 3조9300억원으로 28.5% 감소했다. 같은 기간 원자력 공급 산업체 종사 인력은 13% 줄었다. 2017년부터 지난해 8월까지 중소 원전업체 69곳이 폐업했다. 5년간 전체 원전 중소기업의 14.7%가 문을 닫았다.(한국원자력산업협회 자료)
작년 하반기부터 국내 원전 생태계가 살아나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제 시작이지만 미래를 낙관할수만은 없다고 말한다. 정동욱 원자력학회장(중앙대 에너지시스템공학부 교수)은 "원전 산업이 지속 가능하려면 세계로 가야한다”고 말했다. "원전 수출은 월드컵 같은 국가대항전”이며 “정부가 우리나라 수출 업체과 한 팀이 돼 수출 길을 확보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지난해 한수원은 UAE 원전 수주 이후 13년만에 이집트 엘다바 원전을 수주했다. 올해는 폴란트·체코 등과 원전 수출을 논의하고 있다.
원전은 에너지 대전환기에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꼽힌다. 탄소를 내뿜는 화석 연료 발전 시대는 끝났고 태양광·풍력 만으로는 에너지 수요를 감당하기 어렵다. 탄소를 적게 배출하는 원전이 위험한 에너지가 아니라 친환경 에너지로서 부각 받고 있다. 유럽연합은 지난해 원전을 '그린 택소노미(녹색분류체계)'로 분류했고 미국·일본 등 선진국은 원전 투자를 확대하고 있는 추세다.
소형 모듈 원전(SMR) 등 새로운 원전이 차세대 에너지원으로서 각광받고 있다. 김홍범 삼홍기계 대표는 "두산에너빌리티를 중심으로 한 원전 제조 기술은 국내 원전 산업이 세계 최고라고 자부한다"며 "반도체 분야의 TSMC처럼 국내 원전 산업도 SMR 파운드리(위탁생산)로 대규모 수출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용훈 카이스트 원자력·양자공학과 교수 역시 원자력이 화석연료의 가장 큰 대안이라고 강조한다. 신규 원전과 SMR을 적극 활용해야 탄소 중립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는 "대한민국은 주변에 의지할 나라가 없다. 원전은 에너지 안보에도 매우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정동훈 기자 hoon2@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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