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산가 등으로 둔갑한 조직적 사기
빌라촌 '쑥대밭', 2030은 '피눈물'
[아시아경제 차완용 기자] 2014년 7월. 인천 중구 신흥동에서 전세 사기 피해자 손 모씨(45)가 아내와 두 자녀를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났다. 분신이라는 끔찍한 방법을 선택했다. 사회적 약자였던 손 씨의 안타까운 사연에 사람들은 분노했고, 정부는 전세제도를 손봐 다시는 이런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로부터 8년여가 흐른 현재, 바뀐 것은 없다. 일부 권고 조항이 생겼지만, 실효성은 미미했다. 오히려 최근 몇 년간 이어진 부동산 가격 폭등을 기회로 전세 사기는 성행했다. 집이 자산 증식의 창구라는 인식이 일반화되면서 집에 대한 투자가 당연시됐고, 이를 틈 타 사기범 등은 투자가, 자산가 등으로 둔갑해 조직적인 사기행각을 벌였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소위 ‘빌라왕’, ‘건축왕’, ‘빌라의 신’이라고 불리는 이들이 벌인 전세 사기 사건만 6300채가 넘어섰다. 그 외 수십 수백 건의 사건까지 더하면 지금까지 드러난 전세 사기가 약 8000채로 집계된다. 검거 인원만 844명, 이 중 83명은 구속됐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전세 사기도 허다하다. 피해 규모가 어느 정도일지 예측조차 되질 않는다. 특히 아시아경제가 이번 전세 사기 심층취재를 진행하면서 아직 알려지지 않은 전세 사기 의심 사례도 포착됐다. 서울 대학가 근처 도시형생활주택(원룸) 32채가 전부 분양사기 또는 전세 사기 피해 정황이 포착된 사례로, 서울시 민생침해 범죄신고센터에 이를 알렸다.
◆전세 사기 먹잇감 된 빌라촌 사람들=전세 사기에 활용된 주택 유형은 대부분이 신축 빌라나 다세대 주택이다. 시세 정보가 명확하지 않고 ‘신축’, ‘풀옵션’ 등의 혜택을 내세우면서 세입자를 끌어모으기 용이했던 까닭이다.
대상 지역은 신축 빌라나 다세대 주택이 모여 있으면서 가격이 낮고 수요가 많은 곳이다. 서울 강서구 화곡동, 인천 미추홀구 숭의·주안동, 부평구 부평동 등이 조건과 일치한다. 실제로 주택도시보증공사(HUG)가 파악한 상위 30위 전세보증금반환보증 집중관리 지역별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기준 화곡동에서 발생한 전세금 미반환 사고는 737건으로 압도적 1위다. 이어 인천 부평구 부평동(189건), 인천 미추홀구 숭의·주안동(160건), 서울 양천구 신월동(157건), 전남 광양시(131건) 등에서도 100건 이상의 관련 보증사고가 발생했다.
가장 많은 전세 사기 건수가 발생한 강서구 화곡동의 경우 아파트 비율은 14.7%(1만2666세대)에 불과하다. 화곡2동의 95.4%, 화곡4동의 92.5%, 화곡본동의 94.1%, 화곡8동의 93.5%가 아파트 이외의 주택에 거주한다.
인천 부평구 부평동과 미추홀구 숭의·주안동은 전형적인 구시가지로 신축 건물의 경우 주변과 시세 비교가 어렵다는 점을 사기범들이 파고들었다. 이로 인해 전세 사기에 이용된 주택 대부분이 새로 지어진 빌라 또는 1개 단지의 아파트다. 말이 아파트지 사실상 도시형생활주택이다.
전세 사기 범죄는 전셋값이 단기간에 급등한 부동산 시장 상황을 파고들었다. 특히 아파트 전세를 구하기엔 돈이 부족한 이들이 피해자가 됐다.
전세 사기 피해를 본 김지연 씨(33)는 “천안에서 직장을 다니다 서울로 발령을 받으면서 화곡동에 전세를 구하게 됐다”며 “천안에서 살던 아파트 전세는 1억2000만원이었는데, 이 돈으로는 서울에서 아파트를 구할 방법이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이곳저곳 알아봤지만 결국 화곡동 빌라 전세를 구하게 됐고 사기 피해를 보게 됐다”고 말했다.
전세 사기는 주로 세를 끼고 집을 사는 갭 투기 수법이 활용됐다. 집값 대비 전셋값 비율이 높거나 매매가가 형성되지 않은 신축 빌라를 집중 매수해 법인·바지사장·공인중개사·브로커 등을 동원해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전세 사기 피해자 10명 중 7명이 20·30=전세 사기 피해자 중 20·30세대가 절반이 넘는다. 서울의 비싼 집값과 1인 가구 증가 추세가 반영된 결과로 풀이된다. 이와 함께 지난해 금리가 크게 오르면서 청년층의 상환 부담이 급증한 점도 이유로 꼽힌다. 2021년 말 기준 전세대출 잔액 중 변동금리 비중은 93.5%에 달해 금리 인상에 따른 직격탄을 그대로 맞았을 공산이 크다.
실제 국토교통부가 지난 9월 28일부터 11월 30일까지 전세피해지원센터에 접수된 687건의 전세 사기 의심 피해사례를 분석한 결과 피해자의 연령대 중 30대(50.9%)와 20대(17.9%)가 68.8%를 차지했고 40대는 11.3%, 50대는 6.6%인 것으로 조사됐다.
또 주택도시보증공사(HUG) ‘집중관리 다주택 채무자 현황’에서도 전세 사기가 ‘2030 빌라 세입자’들에게 집중되고 있음이 확인된다. 이 통계는 전세금을 돌려주지 않아 HUG가 대신 갚아준(대위변제) 경우가 3건 이상, 미회수 금이 2억원 이상인 임대인 미반환 사례를 분류한 것으로 지난해 전세 사기 피해를 본 임차인 4명 중 3명이 20·30세대였다.
한국주택금융공사(HF)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말 기준 전세자금보증 가입자 중 은행에 전세자금을 상환하지 못해 주금공이 대위변제한 금액은 2675억원(5564건)이다. 특히 이중 절반 이상인 56.84%(1520억원)는 20·30세대가 빌렸다. 20·30세대가 차지하는 비율은 2020년까지만 해도 40% 초반대를 유지했었으나 2021년 급증했다.
문제는 올해도 기준금리 인상에 따른 대출 이자 부담과 집값 하락이 겹치면서 초래된 깡통전세로 인해 전세자금 피해가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박상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주택도시보증공사(HUG)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임대사업자 보증보험에 가입한 주택 70만 9026가구 중 54%가 집주인의 부채비율이 80%가 넘는 ‘깡통주택’인 것으로 나타났다.
부채비율이란 집주인의 주택담보대출 등 담보권 설정 금액과 전세보증금을 합한 금액을 집값으로 나눈 수치로, 이 비율이 80%를 넘으면 집을 처분해도 세입자가 보증금을 제대로 돌려받지 못할 수 있어 깡통주택으로 불린다.
차완용 기자 yongcha@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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