父親 안태훈이 조직한 '갑오의려'서 맹활약
"외국인 배척 핑계로 관리 죽이고 백성 약탈"
동지 여섯 명과 함께 2만여 적병 대장소 기습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전봉준을 중심으로 벌어진 반봉건·반외세 운동이다. 농민들이 궐기해 부정·외세에 항거했다. 실패로 끝났으나 훗날 갑오개혁, 3·1운동 등에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된다. 모든 역사 기술이 칭찬 일색은 아니다. 불의로 전도된 기록도 적잖다. 우국지사 황현의 '매천야록'과 독립운동가 박은식의 '독립운동지혈사'가 대표적인 예. 전자에는 동학당의 비행이 자세히 소개된다. 후자에도 비슷한 내용이 담겼다. "동학당 무리가 각지에 세력을 뻗치고 함부로 살인과 약탈을 감행했는데 그 기세가 대단히 사나웠다. 오랫동안 태평세월을 지낸 백성들은 모두 겁을 먹고 뿔뿔이 도망쳤다."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순국한 안중근도 비슷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옥중 자서전 '안응칠 역사'에 "동학당은 외국인을 배척한다는 핑계로 군현을 가로지르며 관리들을 죽이고 백성들의 재산을 약탈했다"라고 적었다. "나의 아버님(안태훈)은 동학당의 폭행을 참기 어려워 동지들을 모으고, 격문을 뿌려 의병을 일으키고, 포수들을 불러 모으는 한편 처자들까지 행렬에 편입시켰다. 이렇게 해 모인 정병 일흔 명은 청계산에 진을 치고 항거했다."
처음 참여한 전투의 적이 동학군이란 사실은 당혹스럽다. 오늘날 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 대부분에게 긍정적으로 각인돼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안중근을 다룬 몇몇 서적에는 악행을 저지른 일부 무리로 표현돼 있다. 소설가 조정래가 쓴 위인전이 그렇다. "동학군 모두가 인간 차별이 없는 인내천의 세상, 타락하고 썩은 벼슬아치들을 몰아낸 새 세상 건설을 위해 바르게 행동한 것은 아니었다. 동학군을 빙자해 닥치는 대로 돈을 빼앗거나 도둑질하는 자들의 행패가 곳곳에서 벌어졌다. 올바른 동학군들은 그런 가짜 동학군들을 없애기 위해 또 싸워야 했다."
이들을 '가짜' 동학군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대장이 원용일이었다. 김유영, 한화석, 방찬두 등과 함께 봉기에 참여했는데 1896년 동학 2대 교주인 최시형을 만나 정식으로 동학도가 됐다. 동학농민전쟁 기간 해주의 감영과 옹진의 수영을 점령한 활동이 사후에 승인된 셈이다.
황해도에선 다른 지역과 달리 동학군에 맞선 양반 사족 중심의 반동학군이 많지 않았다. 안태훈이 지역 산포수와 청년들을 모아 조직한 갑오의려가 사실상 유일했다. 당시 양반 계층이 부대를 조직한 목적은 단순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거나 공을 세워 입신출세의 기회로 삼고자 했다. 안태훈의 경우는 달랐다. 독립운동사·친일반민족사 연구가 김삼웅은 저서 '안중근 평전'에 "안태훈은 일찍이 개화파 세력에 가담한 경력이 있었다"라고 적었다. "이후의 일이지만 천주교로 개종하고 적극적으로 전도 사업을 벌일 만큼 서구문물 수용에 앞장섰던 개화파였다. 그런 점으로 미루어 안태훈의 반동학적 입장은 개화적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황재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는 안태훈이 박영효가 주도한 유학생단에 포함됐던 사건에 주목한다. 동학군은 박영효로 대표되는 개화 인사들에게 적대적이었다. 2차 봉기에서 공표한 한글 격문에서도 확인된다. "성상의 인후하심에도 세 항구를 열어 통상 후인 갑신 10월에 네 원흉(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광범)이 적을 도와 군부의 위태로움이 조석이 되었지만 종사의 흥복에 의해 간당을 소멸했다. (…) 생각해보면 조선인끼리라면 도속은 다르다고 해도 척왜척화(斥倭斥和·나라를 침략한 왜국을 배척하고, 그들과의 화친도 배척함)는 그 뜻이 일반이다."
안중근 의사 유언 장면척왜의 대상은 일본. 척화, 즉 무엇을 배척한다는 뜻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중국일 수도 있고, 개화일 수도 있다. 황 교수는 저서 '안중근 평전'에서 "전자라면 선언의 요지가 외세 일반에 대한 배척의 뜻일 것이며, 후자라면 일본 세력 및 그에 의지한 개화에 대한 배척의 뜻이 될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어 "후자로 해석할 수 있다면, 동학군의 2차 봉기는 안태훈의 정치적 태도와 대립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개화와 동학은 반봉건을 지향하나 이념적 지향이나 실천 논리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전자는 서구 논리를 수용하고 추구했다. 반면 후자는 외세를 배척하고 전통 논리에 의해 반봉건 구현을 모색했다. 전자를 외세 침략의 앞잡이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전자도 후자를 민란 내지는 폭도로 규정하기 쉬웠다. 안중근은 더 큰 혼란까지 우려했다. 안응칠 역사'에 "(동학당 봉기로) 관군이 진입할 수 없었으므로 청나라 군사가 건너왔고, 또한 일본 군사가 건너왔다. 일본과 청나라가 충돌하니 반드시 큰 전쟁이 일어날 듯했다"라고 적었다.
당시 나이는 열여섯 살. 아버지의 만류에도 총을 메고 선봉 겸 정찰대를 자처했다. 안중근은 수십 차례 전투에서 승리했다. 매번 맹사격으로 상대를 대경실색하게 했다. 그러나 유리한 고지는 2만여 명에 달한 동학군이 점하고 있었다. 오합지졸이지만 정신과 용맹만큼은 여느 군대 못지않았다. 계급해방의 성격을 띠고 있어 쉽게 물러서지도 않았다. 장연군, 신천군, 장수산성, 수양산성 등을 모두 점령하고 갑오의려까지 기습하려 했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안태훈은 급보를 전해 듣고 선제공격했다. 산포수 노제석에게 정병 마흔 명을 주어 출전토록 했다. 안중근은 동지 여섯 명과 따로 움직였다. 전진 수색해 적병 대장소가 있는 지척에 다다랐다. 훗날 그는 당시 행적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숲 사이에 숨어 엎드려 적진 형세의 동정을 살펴보니 기폭이 바람에 펄럭이고 불빛이 하늘에 치솟아 대낮 같은데 사람과 말들이 소란해 도무지 기율이 없었다. 나는 동지들을 돌아보며 '만일 지금 적진을 습격하기만 하면 반드시 큰 공을 세울 것'이라고 했다. 동지들은 '얼마 안 되는 잔약한 군사로 어찌 적의 수만 대군을 당해낼 수 있겠는가'라고 되물었다. 나는 다시 대답했다. '그렇지 않다. 병법에 이르기를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 백번 이긴다고 했다. 내가 적의 형세를 보니 함부로 모아놓은 질서 없는 군중이다. 우리 일곱 사람이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치기만 하면 저런 어지러운 무리야 백만 대중이라고 해도 겁날 것이 없다. 아직 날이 밝지 않았으니 뜻밖에 쳐들어가면 파죽지세가 될 것이다. 그대들은 망설이지 말고 내 계책을 따르라.' 모두 응낙해 그대로 계책을 정했다. 호령 한마디를 신호로 일곱 사람이 일제히 적의 대장이 있는 곳을 향해 총을 쐈다. 벼락같은 총소리에 천지가 흔들리고, 탄환은 우박처럼 쏟아졌다. 적군은 미리 대비하지 않았으므로 미처 손을 쓸 틈도 없었다. 갑옷도 채 입지 못한 채 기계도 버리고, 서로 밀치고 밟으며 온 산과 들로 달아났다. 우리는 승세를 타고 추격했다."
호기로운 기세는 오래가지 않았다. 이윽고 동이 터 동학군이 안중근 쪽의 형세가 대단치 않음을 알아차렸다. 이내 사방에서 포위해 공격을 퍼부었다. 안중근은 활로를 찾지 못하고 전전긍긍했다. 하지만 등 뒤에서 포성과 함께 한 무리의 군사들이 달려와 위기를 벗어났다. 본진에 남아있던 후원병들이었다. 안태훈 부대는 한 명도 다치지 않고 크게 승리했다. 총기, 군마, 군량미 등 전리품도 확보했다.
안중근은 자신 있는 태도와 설득으로 작전을 과감히 실행해 승리의 주역이 됐다. 그러나 이어진 추격은 분명 무모했다. 아무리 패해 달아나는 적군이라 하더라도 일곱 명만으로 2만 명을 추격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뒤이어 당도한 부대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했으나 지혜로운 작전으로 보기 어렵다. 황 교수는 '안중근 평전'에 "이 한 번의 싸움만으로도 전투에 임하는 안중근의 태도를 짐작해볼 수 있다"라고 기술했다. "과감하고 용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모한 면도 보인다는 것이 대략적인 내용일 것이다. 이러한 자세가 이후 안중근의 생애에서 어떻게 이어지거나 달라지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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