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송천 카이스트 경영대학 명예교수
“12km 출근길 매일 걷는다”
1만8172보 함께 걸으며 인터뷰
성수대교-서울숲-한양대-서울시립대-카이스트 경영대학
걷는 데 2시간12분
[아시아경제 변선진 기자] 문송천 카이스트 경영대학 명예교수(71)는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서 카이스트 경영대학이 있는 동대문구 홍릉까지 매일 걸어 출근한다. 이렇게 걷는 길만 2시간. 빠르게 가면 9km를 걸으면 되지만 한양대와 서울시립대를 돌고 돌아 12km를 일부러 걷는다. 문 교수는 컴퓨터 데이터베이스 분야 최고 권위자이자 한국 전산학의 제1호 박사로 꼽힌다. 그가 1977년 집필한 ‘컴퓨터개론’은 한국 최초 전산학 지침서가 돼 한국 IT 발전에 큰 공로가 됐다. 그런 문 교수는 1999년부터 걷기가 삶에서 일상이 됐다.
20년 이상 12km 출근길을 걷다
기자는 4일 오전 문 교수가 매일 걷는다는 출근길을 함께 걸었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중·고등학교를 지나는 성수대교에서부터다. 문 교수는 오랫동안 출근길을 걸어온 덕분인지 한강다리 25개의 코스를 모두 꿰고 있었다. "양화대교는 가장 걷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반면 동작대교는 가장 짧죠." 성수대교를 통해 한강을 지날 때, 문 교수에게 왜 2시간이 걸리는 출근길을 걷느냐고 묻자 인생에서 크게 아팠던 두 번의 경험을 떠올렸다.
첫 계기는 대학생 1학년 때 급성간염을 앓아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부터다. "1학년 때 잠을 자지 않고 공부하다가 쓰러져 검진을 받았더니 급성간염이라는 판정을 받았어요. 이전까지는 건강에 문제가 없으니 운동은 하지 않고 목표를 향해 전진하면 됐는데, 막상 막다른 골목에 가보고서야 운동의 중요성을 깨닫게 됐어요." 이 때부터 축구·테니스 등 운동에 입문했지만, 걷기의 중요성은 아직 느끼지 못했다.
걷기에 빠지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새천년으로 바뀌기 직전 해인 1999년에 ‘Y2K(2000년 문제·컴퓨터가 2000년을 1900년으로 인식해 발생하는 문제)‘ 난제를 풀기 위해 전 세계를 다닌 탓에 체력이 바닥나면서다. 당시는 전 세계적으로 Y2K 난제를 풀지 못하면 컴퓨터 오류로 지구가 멸망할 수 있다는 가설까지 나올 정도였기 때문에, 전산학 권위자인 문 교수로서는 감히 쉴 수가 없었다. 격렬한 운동을 전혀 하지 못한 이유다. 이 시기 엘리트 운동인 마라톤이 일반인에게도 확산하기 시작했다. 문 교수는 "자신이 없어 체력테스트 겸 걷기를 한 뒤 완주에 성공했다. 이 때부터 2시간 되는 출근길을 매일 걸었다"고 말했다. "뛰는 연습 없이 마라톤 풀코스를 41회 완주한 원동력은 걷기에서 나왔다"고 했다.
인천국제공항이 생기기 전엔 뉴욕 출장을 가기 위해 압구정에서 캐리어를 끌고 25km가 되는 김포공항을 일부러 걸어가기도 했을 정도다. "한창일 때는 김포공항까지 걷다가 비가 오면 택시를 타는 게 아니라 편의점에 들러 우산을 쓰고 갔죠. 13시간 있어야 하는 비행기 안에서 푹 쉬고 나면 오히려 에너지가 넘쳐 더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었어요."
1시간 걸으니 ‘벌써 절반’
영하 3도가 되는 쌀쌀한 날씨였지만 30분을 걸어 성동구의 서울숲에 도착하니 조금은 덥다고 느껴졌다. "축구·테니스 등 격한 운동은 다치는 경우가 많지만 걷기만큼 쉽고 효율적인 운동은 없습니다. 걷기 운동을 시작하기 전엔 매년 연례행사처럼 몸살을 앓았지만, 이후 24년간 감기 등 잔병치레가 없었죠."
"저처럼 걷기가 습관화되지 않은 이들은 어떡하나요?" 기자가 물었다. "무엇이든 목표 없이는 작심삼일되기 십상입니다. 꾸준히 하기 어렵다는 것이죠." 문 교수는 걷기를 위한 작은 목표를 달성하고 더 나아가 큰 목표를 세우라고 조언했다. "양재역에서 학여울역까지가 먼 거리 같아 보이지만 4km에 불과합니다. 천천히 1시간이면 충분히 걸을 수 있는 거리죠." 문 교수는 이어 6.5km 만보 걷기에 나서고 12km 걷기도 실천하라고 조언했다.
서로 도울 수 있는 가족과 함께하는 것도 좋다고 했다. 문 교수는 "영국 캠브리지대와 에딘버러대에서 강의할 때 영국인들은 1월1일 신년맞이로 가족과 함께 집 주위 들길을 10~15km 정도 함께 걸으며 1년 계획을 서로 주고받더라"며 "우리는 해돋이를 보기 위해 차로 4~5시간의 교통체증을 버티다 화도 내기도 하는데, 함께 걸으며 진솔한 대화를 나누것도 괜찮은 방법일 것"이라고 말했다.
"출퇴근으로 바쁜 직장인들은 걸을 수 없지 않나요?" 또 물었다.
"시간이 진짜 부족한 건지 의지가 약한 건지 한번 되돌아봐야 합니다. 24시간을 꽉꽉 채워서 사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 것 같으세요? 직장이 있는 ‘압구정역’에 내린다면 한 정거장 차이나는 ‘신사역’에 내려 걸을 수도 있죠. 하루 스마트폰 보는 시간을 줄일 수도 있고요. 시간은 조절 가능한 문제죠."
건강한 몸·사회, 창의성…'세 마리 토끼' 잡기
어느덧 한양대까지 다다르는 데 1시간30분. 기자는 문 교수에게 "나이가 들다보면 이렇게 걷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문 교수는 걷기는 ‘체력을 위한 적금’이라고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미리 꾸준히 걸어 못 걷는 시간을 늦추는 게 중요하죠. 근육은 안 쓸수록 줄어드니까요. 나이가 들수록 다치지 않게 운동하는 것도 중요한데, 최고의 운동은 걷기라고 봅니다. 축구는 40세, 테니스는 50세, 마라톤은 60세 등 다른 스포츠는 연령제한이 있지만 걷기는 없죠. 유일하게 지속가능한 운동이란 겁니다. 노년에 은퇴하고 나이가 들다보면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는데 ‘더 걸을 수 있는 시간이 많다’며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문 교수는 걷기를 꾸준히 실천하다 보면 ‘소셜(social) 운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봤다. "몸이 건강해지면 나아가 남을 생각하게 되고 이런 의미에서 걷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건 건전한 사회 구축이 잘 되고 있다는 맥락과 연결된다"면서다.
한양대에서 청계천을 따라 걷다 청량리역 방면으로 서울시립대를 거친 뒤 최종 목적지인 카이스트 경영대학에 도착하는 데 걸린 시간은 총 2시간12분. 걸음 수 1만8172보. 문 교수의 아침은 이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앞으로도 이렇게 출근길을 계속 걷겠다"는 게 문 교수의 말이다.
문송천 카이스트 명예교수 /허영한 기자 younghan@문 교수는 갑갑한 공간에서 연구만 하다보면 풀리지 않던 문제의 해법이 출근길에서 떠오른다고 했다. 교수 생활 동안 지치지 않고 IT분야 저서 21권과 200여 편의 학술 논문을 쓰는 성과를 만들 수 있었던 원동력에서 걷기를 찾는다. 지도학생들에게도 되도록이면 걸으라고 권한다고 했다. "제가 걸으라고 했던 지도학생이 나중에 교수가 돼 제자들에게 똑같이 걸으라고 하더라고요. 건강한 몸과 사회, 창의력 세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걷기, 정말 최고의 운동이지 않나요?"
편집자주
아시아경제가 ‘2023 범국민 뇌건강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하루만보 하루천자’운동을 벌입니다. ‘하루만보 하루천자’는 건강한 100세 시대, 날카로운 뇌를 유지하기 위해 하루에 만보를 걷고 하루에 천자를 쓰자는 운동입니다. 이를 위해 ‘하루만보 하루천자 뉴스레터’ 구독자에게 걷기 좋은 코스, 쓰기 좋은 콘텐츠를 제공합니다. ‘하루만보 하루천자’ 운동은 나와 내 가족을 지키는 가장 돈이 들지 않는 현명한 운동입니다.
변선진 기자 sj@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