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사 3.6년치 일감 확보에도 인력 부족
52시간제·근무여건 개선 등 지원 절실
[아시아경제 오현길 기자] 올해 수주 풍년에 오랜만에 웃음을 되찾은 조선업계가 좀처럼 해소되지 않는 인력난에 발목이 잡혔다. 내년에는 1만명 이상 인력이 부족하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많은 기술직 종사자들이 조선사를 떠나면서 미숙한 비숙련 종사자 비중이 늘고, 남은 경력자들은 더 많은 작업을 감당하면서 고강도 업무에 시달리고 있다.
단순히 임금을 올린다고 인력 유출을 막을 수 없다는 게 조선업계의 시각으로, 52시간제와 지역 근무 여건 개선 등 제도적 지원이 절실하다고 업계는 호소하고 있다.
26일 클락슨리서치는 국내 조선사들의 수주 잔량은 11월 기준 3657만CGT라고 밝혔다. 통상적으로 연간 1000만CGT를 생산하는 것으로 추정할 때 3.6년 이상 일감을 확보한 셈이다. 연초에는 일감이 줄어들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일감이 늘었다. 올 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일부 러시아 사업이 취소되는 등 위기가 오는 듯했다.
하지만 유럽이 러시아산 가스 수입 대체 목적의 LNG(액화석유가스) 운반선을 많이 주문하면서 국내 조선업계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한국조선해양과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 등 조선 3사는 LNG선을 앞세워 2년 연속 수주 목표를 초과 달성했다. 한국조선해양이 목표의 127.8%를 넘겼으며, 대우조선해양은 117%, 삼성중공업이 107%를 기록하며 일감을 쌓았다. LNG선만 따지고 보면 대우조선해양이 19척, 삼성중공업이 18척, 현대중공업이 17척을 수주했다.
수주가 쌓이면서 당장 내년부터 선박 건조량은 급격하게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코로나19 여파로 올해 건조량은 790만CGT에 그칠 것으로 예상되는데, 내년에 예정된 인도 물량만 1126CGT에 달한다. 올해보다 42.5%나 늘어날 예정이다. 24년에는 1192CGT로 더 늘어난다.
하지만 현장에서 일손을 구하지 못해 자칫 납기 지연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수년째 조선업계 인력은 감소 추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국내 조선 3사의 임직원 수(기간제 근로자 및 단기간 근로자 제외)도 3분기 기준 2만7943명으로 1년 전 2만9683명보다 5.9% 줄었다.
한국조선해양플랜트협회는 올 3분기 기준 조선업계의 부족한 인력이 95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한다. 내년에는 부족 인력이 1만1000명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최근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실시한 산업 인력수급 상황 체감조사에서 조선업종 기업 가운데 52.2%가 인력이 부족하다고 호소했다. 생산직무 인력 부족 답변은 96.6%에 달했다.
이은창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2020년 4분기 이후 대량 수주가 이어지면서 생산활동도 활발해지는데 수익성 개선이 더디면서 임금인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인력모집에 어려움을 겪거나 파업으로 인력 부족 문제가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인력 확보가 한시라도 시급하지만, 업계로써는 뾰족한 수가 없다. 조선사의 수익성 개선에 따라 임금이 오르기를 기다리기에는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 수밖에 없어서다.
정부와 조선업계는 외국인 전문인력 투입에 속도를 내고 있지만 충분치 않은 수준이다. 정부는 올해 고용허가제(E-9)로 국내에 들어올 수 있는 외국 인력 신규 입국 쿼터를 기존 5만9000명에서 6만9000명으로 1만명 늘린 바 있다.
조선해양플랜트협회도 그동안 태국,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베트남 등 주요 국가에 검증단을 파견해 4000여명을 대상으로 기량을 검증하고, 현재 300여명의 전문인력에 대한 입국 절차를 진행하고 있지만, 일자리를 채우기는 역부족하다.
또 정부는 거제시를 ‘고용위기지역’으로 지정하고 내년부터 200억원 규모의 지원사업을 추진키로 했다. 고용위기지역 지정으로 근로자는 생활안정자금 상환기간 최대 8년, 자녀 학자금 700만원, 직업훈련 생계비 대부 한도 최대 2000만원 등 지원을 받는다. 사업주도 유급휴업·휴직에 대한 고용유지지원금을 수당의 90%까지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조선업계에서 인력 이탈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하청노동자의 고용불안과 저임금 구조를 극복할 수 있는 보다 근본적인 해법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흥준 서울과학기술대 교수는 "하청 등 기존 방식으로는 인력수급이 어렵다"며 "상생형 일자리 모델을 통한 숙련인력 확보와 함께 사내협력사 노동자 처우 개선, 정규직 채용 확대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오현길 기자 ohk041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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