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변선진 기자] 정부가 재외국민·외국인의 ‘건보 먹튀’를 막으려 의료 혜택을 받기 위한 자격을 꾸준히 강화하자, 이주민 사회에서는 역차별이라는 반발이 나오고 있다. 일부 ‘무임승차’ 사례를 막기 위해 외국인 전체에 대해 건보 관리체계를 강화하는 건 부당하다는 것이다. 이주민들은 “여러 이유로 내국인보다 병원도 자주 못 가는데 보장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토로한다.
보건복지부는 지난 8일 건보 개편안을 통해 재외국민을 포함한 외국인 피부양자 자격 요건 강화 등을 발표했다. 그간 외국인의 배우자·미성년 자녀 이외 장인·장모 등도 입국 직후부터 피부양자로 건보 적용을 받을 수 있었다. 이에 배우자·미성년 자녀를 제외한 이들에게도 6개월의 필수 체류 기간을 두기로 한 것이다.
건보 직장가입자는 소득·재산이 일정 수준에 못 미치는 피부양자를 둘 수 있다. 피부양자로 등록되면 건보료를 내지 않고도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는 국민건강보험법의 ‘외국인 등에 대한 특례조항(제109조)에 따라 재외국민을 포함한 외국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문제는 해외에서 병을 얻은 외국인 피부양자가 입국해 의료 혜택을 본 뒤 본국으로 돌아가는 사례가 있었다는 점이다. 약값이 비싸고 지속적으로 처방받아야 하는 희귀난치성질환 환자가 이런 방법으로 2017년부터 약 30억원의 의료비 혜택을 본 사례가 대표적이다.
재외국민·외국인 "건보료 내국인과 똑같이 내는데 보장 기준은 자꾸 달라져"
재외국민과 외국인들 사이에서 불만이 커지는 이유는 건강보험의 보장 기준이 내국인과 점차 달라져서다. 미국에 장기 체류 중인 재외국민 A씨(40대)는 “시아버지 밑으로 피부양자로 등록돼 있고 건보료를 꼬박꼬박 내는 건 똑같은데 정작 입국 후에 의료비 지원을 못 받으니 억울한 측면이 있다”고 토로했다. A씨는 “간단한 치료는 건보 혜택을 굳이 받지 않더라도 미국과 비교했을 땐 비싸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면서도 “고치기 어려운 큰 병에 걸렸을 경우엔 걱정이 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윤 서울대 의대 의료관리학 교수는 “보험의 본질은 예측할 수 없는 질병 발생으로 환자의 의료비 부담을 줄여주는 데 있다”며 “외국인 피부양자가 입국하기 전부터 지병을 갖고 있으면 보험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다. 내국인이 국내에 태어나 건보료를 내다 병에 걸려 의료비 지원을 받는 것과는 다른 상황”이라고 짚었다.
다만 김 교수는 “외국인의 건보 ‘무임승차’는 소수 사례에 불과하고, 이번의 외국인 피부양자의 체류기간을 6개월로 둔다고 해서 재정건전성을 유의미하게 확보할 수 있는 건 아니다”며 “일부 사례를 막기 위해 외국인 전체에 적용하는 것보다 피부양자 등록단계에서 해당자가 중병을 앓아 당장 건보 혜택을 받으려고 하는 건지 등을 알 수 있는 시스템 마련이 더 적절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외국인 건보 관리체계 '무임승차' 막는다는 목적으로 계속 강화돼와
외국인 건보의 관리체계는 일부 외국인의 무임승차를 막는다는 목적으로 지속적으로 강화돼왔다. 그러나 제도적 허점을 이용하지 않는 외국인과 재외국민들은 이 때문에 불편함을 호소한다.
보건복지부는 2019년 7월 외국인·재외국민 건강보험 의무 가입제도를 시행하면서 국내에 6개월 이상 체류하는 이들은 건보에 의무적으로 가입하게 했다. 이전까지는 외국인과 재외국민은 국내에 3개월만 머무르면 지역가입자로 임의 가입할 수 있었다.
재외국민 B씨(50대)는 “건보료를 10년 이상 꾸준히 내왔는데 코로나19로 하늘길이 막혔던 2020년엔 3개월 안으로 한국에 입국할 방법이 없어 건보 혜택이 아예 사라졌다”며 “건보를 살리려면 6개월 체류해야 한다는 답변을 공단 측으로부터 받았다. 해외사업이 있는데 이는 불가능한 얘기”라고 하소연했다.
손호준 보건복지부 보험정책과장은 “그간 외국인 건보 관리체계를 강화한 데는 의료 목적으로 입국하는 무임승차 사례를 차단하기 위해서다. 건보 제도는 국내에 있는 내국인을 위한 복지이기 때문에 차별이라고 보긴 어렵다”며 “외국인 건보 제도가 강화되더라도 대부분의 외국인·재외국민들에겐 영향이 가지 않을뿐더러 부당 사례를 방지해야 건보 제도에 대한 신뢰성과 재정건정성이 제고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외국인 건보 재정수지는 꾸준히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이는 외국인들이 받는 건보 의료 혜택의 합보다 낸 건보료의 합이 더 많다는 뜻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지난해 재외국민·외국인이 낸 보험료는 1조5793억원인 반면 건보 보험급여로 받은 금액은 1조668억원이었다. 작년 외국인 건보는 5125억원의 흑자를 본 것이다. 이전의 외국인 건보 흑자는 2018년 2255억원, 2019년 3658억원, 2020년 5729억원 등 양상을 보였다. 외국인 건보 재정의 지출보다 수입이 많은 이유는 우선적으로 언어장벽이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이후인 2020년과 지난해엔 외국인 건보의 흑자 폭이 늘어났는데, 이에 대해 건보 관계자는 “코로나19로 병원 방문 수가 줄어든 요인도 있겠지만, 2019년 7월 외국인 지역가입자 ‘신고주의’에서 강제로 편입하게 한 제도 영향이 가장 크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 기간 외국인 지역가입자의 수가 급증한 데다, 이들은 소득·재산의 구체적인 파악이 어려워 건보 전체 가입자가 부담하는 평균보험료 이상을 내야 했기 때문이다.
"외국인 건보 보장 기준, 내국인과 자꾸 달라지면 '건강권 보장'이라는 건보 취지 어긋"
전문가들은 이른바 ‘건보 먹튀’를 막고자 시행한 제도들이 건강권 보장이라는 건보 취지에 어긋나고 역효과가 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문심명 국회 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외국인 건보 관리체계가 강화되면서 내국민과 비교해 불이익이 심화한 점은 저소득층 외국인의 수용성을 떨어뜨리고 건강권 보장에도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했다. 김명광 대구대 교수는 “외국인 유학생 1명이 내는 경제 기대효과가 1500만원인데 건보료 탓에 유학생이 감소하면 국가 전체적으로는 손해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김윤 교수는 “정부가 외국인 건보 제도를 손봐 일부 외국인의 악용을 막는 방식이 사회적 연대 차원에서는 어긋날 수 있다”고 말했다.
변선진 기자 sj@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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