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친밀 관계' 남성에 살해당한 여성 83명
여성단체 "여성살해 현실 외면말고 대책 마련하라"
'친밀성' 탓에 신고·도움 요청도 어려워
"'친밀 관계 폭력' 대응하는 법·제도적 기반 마련해야"
친밀한 관계에서의 여성폭력을 근절할 방안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사진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없음. [이미지출처=픽사베이][아시아경제 박현주 기자] 말다툼 중에 여자친구를 잔혹하게 폭행해 숨지게 한 '서울 마포구 데이트 폭력' 사건, 이별을 통보한 전 여자친구를 스토킹하다 흉기로 찔러 살해한 김병찬(36) 등, 지난해 잇따라 발생한 교제 살인 사건은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렸다.
친밀한 관계에서의 여성폭력 문제가 더 이상 '애정 싸움', '연인 간 다툼'과 같은 가벼운 단어로 쓰여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여성단체는 여성폭력에 대한 실태조사와 함께 강력한 처벌, 여성폭력 근절책 등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 1.4일마다 여성 1명 폭력 노출…"'친밀 관계 폭력' 근절해야"
여성 100명 중 16명(16.1%)이 평생 동안 여성폭력 피해를 한번 이상 경험했다. 이는 28일 여성가족부가 공개한 '2021 여성폭력 실태조사' 보고서에 담긴 내용으로, 전국 성인 여성 7000명을 대상으로 벌인 조사 결과다. 여성폭력에는 신체적·성적·정서적·경제적 폭력 등이 포함된다. 폭력 피해 유형은 정서적 폭력(61.9%)과 신체적 폭력(52.5%)이 높았고 성적 폭력(27.9%), 통제(21.8%), 경제적 폭력(10.5%)이 뒤를 이었다.
지난해에만 최소 220명의 여성이 친밀한 관계의 남성에게 살해되거나 죽을 뻔했다. 한국여성의전화가 지난해 언론에 보도된 사건들을 분석한 '2021년 분노의 게이지' 보고서를 보면 남편이나 애인 등 친밀한 관계의 남성에 의해 살해된 여성은 최소 83명, 살인미수 등으로 살아남은 여성은 최소 177명이었다. 1.4일에 1명꼴로 여성이 피해를 본 셈이다. 언론이나 경찰에 집계되지 않는 사건까지 포함하면 실제 사건 발생 건수는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보고서는 "(분석 결과는) 언론에 보도된 최소한의 수치로, 보도되지 않은 사건을 포함하면 살해된 여성이 훨씬 많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여성폭력은 암수성이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암수범죄란 범죄가 실제로 발생해도, 용의자 신원파악 등이 해결되지 않아 공식적 범죄통계에 집계되지 않은 범죄를 말한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연인 혹은 혈연 관계 등에 놓여 '친밀성'을 갖기 때문에 폭력 발생 이후에 피해자가 신고하거나 도움을 요청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여성가족부의 '2019년 가정폭력 실태조사' 결과 배우자로부터 신체적, 성적, 경제적, 정서적 폭력을 경험한 응답자의 85.7%가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경찰(2.3%), 여성긴급전화 1366(0.4%), 가정폭력상담소 및 보호시설(0.4%)를 찾은 이들도 적었다.
친밀 관계 폭력을 '사랑싸움', '애정표현' 등으로 부르며 가볍게 여기는 사회 분위기 탓에 피해자들은 자신이 피해자임을 스스로 인지하는 것에도 어려움을 겪는다. 한국여성의전화가 실시한 '친밀한 관계 내 여성폭력 피해자 포커스그룹 인터뷰'에서 피해자들은 자신이 피해자임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입을 모았다.
여성단체들은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한 여성폭력을 근절해야 한다고 꾸준히 주장해왔다. 한국여성의전화는 여성에 대한 폭력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지난 2009년부터 친밀한 관계의 남성에 의한 여성살해 통계 '분노의 게이지'를 매해 발표해왔다. 단체는 ▲친밀 관계 여성 폭력에 대한 국가 통계 시스템 구축 ▲처벌원칙과 지원체계 마련 ▲여성폭력 근절 및 성평등 실현을 위한 강력한 추진체계를 마련 등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지난 23일 대검찰청은 스토킹 범죄에 대한 엄정대응을 지시했다.◆ 국내 법·제도적 기반 미흡…"미국은 '건강권 관점'서 폭력 예방에 초점"
전문가들은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범죄 또는 폭력에 대응하는 한국 사회의 법·제도적 기반이 아직 미흡하다고 지적한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친밀한 관계에서의 젠더폭력 대응을 위한 정책 방향 모색' 연구는 "한국 사회의 친밀 관계 폭력 대응의 초점은 혼인 및 혈연 관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며 "이러한 협소한 관점으로는 현대사회의 다양한 친밀관계에서 발생하는 젠더폭력의 예방과 근절의 실질적인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1인 가구가 증가하고 비혼 인구가 느는 등 가족 개념이 변화하는 상황에서 '친밀한 관계'에 대한 정의가 더 이상 과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다.
더불어 친밀 관계 폭력에 대한 법률적 기틀이 조속히 마련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법률적 근거가 마련돼있지 않아 가해자 처벌과 피해자 지원, 예방을 위한 구체적인 정책 수립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친밀 관계 폭력에 대응하기 위한 정책적 제도적 목표는 인권과 평등의 관점에서 피해자 지원 및 보호임을 명확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도 강조한다.
연구에 따르면 영국과 미국은 친밀 관계 젠더 폭력에 엄중 대응하고 있다. 영국의 경우 가정폭력 전과 공개제도 도입, 가족폭력방지법 제정 등을 통해 젠더 기반 폭력에 대응할 수 있는 법·제도적 근거가 마련돼있다.
미국 역시 지난 2013년 개정된 여성폭력방지법을 중심으로 젠더 기반 여성폭력에 대응하고 있다. 법은 피해자를 보호하고 폭력행위에 대해 강력 처벌한다. 또 미국의 많은 주에서 가정 폭력 발생 시 가해자를 의무적으로 체포하는 의무체포제 및 의무기소제를 운영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건강권의 관점에서 친밀 관계 폭력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미 질병예방센터(CDC)는 친밀 관계 폭력을 개인과 가족, 지역사회에 심각한 해악을 미치는 문제로 바라보고, 이를 예방하기 위해 폭력의 발생을 사전에 차단하는 '폭력 예방'에 초점을 맞춘다. 사후적 조치보다 1차 예방을 통해 폭력의 발생 자체를 차단하면 폭력 범죄를 실질적으로 감소시키는 효과가 있어서다.
한편 국내에서는 지난 23일 대검찰청이 교제폭력이나 살인 등 강력범죄로 악화되는 스토킹 범죄에 대한 엄정 대응을 지시했다. 피해자를 신속히 보호하기 위해 스토킹사범 정보 시스템을 구축했고, 생명이나 신체에 위해를 줄 가능성이 있는 경우 구속수사를 원칙으로 한다.
박현주 기자 phj0325@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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