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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믿음의 책담] “직원 쥐어짜면 망한다…실패의 경험 허락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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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 인터뷰

[서믿음의 책담] “직원 쥐어짜면 망한다…실패의 경험 허락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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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서믿음 기자] 한기호(64·사진)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은 학창 시절부터 책과 관련한 인연이 많다. 공주사범대 학보사 편집장 시절, 출판사를 쫓아다니며 좋은 책 소개를 부탁했다. 신문에 광고를 싣고 홍보비를 얻으려는 의도도 없지 않았는데, 그 과정에서 책을 가까이하게 됐다고 한다. 출판사에도 득이 되는 일이었다. 에버레트 라이머의 ‘학교는 죽었다’(한마당), 파올로 프레이리의 ‘페다고지’(한마당) 등의 도서를 집중적으로 소개해 공주사대 서점에서만 1600부 이상을 판매했다. 재학생 수를 넘어서는 판매고였다.


이후 포고령 위반으로 옥살이를 한 후 당시 출판이 하나의 (사회) 운동으로 간주되던 시대상을 반영해 1982년 신생 출판에 편집장으로 잠시 몸담았다가, 창비 출판사에 영업자로 들어갔다. 당시 가장 먼저 한 일은 창고에 쌓인 판금서적을 파는 일. 그는 금서로 지정된 ‘신동엽 전집’, ‘타는 목마름으로’ 등을 시중에 대량으로 풀었다. 그의 말처럼 운이 좋아 공안당국에 잡히지는 않았다. 수익 상승은 덤이었다.


그는 영업과 관련한 자질이 남달랐다. ‘소설 동의보감’,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서른, 잔치는 끝났다’ 등을 적극적으로 마케팅해 400만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그렇게 15년을 창비에 몸담았다가 자기 사업을 하기 위해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를 세워 출판전문지 ‘기획회의’를 출판했다. 23.5년의 세월 동안 585호를 찍어냈다. 그사이 세운 임프린트(하위 출판 브랜드) 출판사만 일곱 개.


‘요다’, ‘북바이북’, ‘플로베르’, ‘어른의 시간’, ‘백화만발’, ‘길밖의길’, ‘학교도서관저널’로 독자를 만나고 있다. 최근에는 출판학교를 개설해 출판인 육성에 나선 그를 만나 현 출판계의 상황에 관해 물었다.


- 요즘 출판계를 어떻게 보는지.

▶출판에 미래가 없다고까지는 안 하지만 암담한 건 사실이다. 정보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틀이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출판계에 어떻게 대응해야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만연하다. 보통 2~3년 뒤를 내다보고 기획을 하는데 (코로나의 영향을 포함해) 10년 뒤 세상이 와버렸으니 당황할 수밖에...


- 그래도 소장님은 출판계에서는 성공을 맛본 세대 아닌가.

▶꼭 그렇지만도 않다. 2016년 강릉에서 독서대전을 했을 당시 이야기다. 후배들과 해변에서 술을 마시고 바다에 들어갔다가 너울성 파도에 휩쓸려 죽을 뻔 했다. 당시 자금상황이 어려워 후배들에게 빚을 좀 졌었는데, ‘이거 내가 이대로 죽었더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이 들더라. 빚을 못 갚고 죽는 거 아닌가 하는. 그때부터 출판브랜드를 만들기 시작했다.


- SF나 판타지물, 작법서, 비평서를 출간하기 시작한 게 그때부터인가.

▶2017년 서브컬처 브랜드 ‘요다’와 스낵컬처 ‘플로베르’를 만들었다. 친정 격인 창비와 경쟁할 수 없어 우리는 순수문학은 안 한다고 했다. 요다는 작법서, 비평서, 이론서 위주로 냈기에, 평론가 그룹을 찾아 나섰다. 당시 ‘텍스트릿’이라는 젊은 연구가 모임과 함께 책을 냈는데 그게 ‘비주류 선언’이다. 지금까지 세권이 나왔고 앞으로 열권 넘게 나올 예정이다. 평론가 그룹이 많아져야 시장이 커지는 것 아니겠나. 시장을 키우려는 의지를 갖고 만들었다.


- SF소설로 유명한 김동식 작가를 만난 것도 그때 즈음인가.

▶운이 좋았다. 김동식 작가 덕에 안정을 찾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알기로 우리 출판사 신입 연봉이 업계 최고 수준이다. 2017년 급여를 인상할 때 직원들이 ‘우리 망하는 거 아니냐’고 걱정했는데, 김동식 작가 책이 팔리고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이듬해 연봉인상 때는 아무도 걱정을 안 하더라.(웃음)


- 출판계가 고스펙 저연봉으로 유명하다. 온라인에 돌아다니는 출판계 연봉공개 문서를 보면 참혹한 수준일 때가 많다.

▶난 절대로 직원 간에 경쟁 안 시킨다. 야근도 하면 잔소리하는 스타일이지 권하지 않는다. 하지만 문학 기획자는 시키지 않아도 24시간 일하는 경우가 많다. 퇴근 후 작가를 만난다거나, 집에 가서 책을 보는 것도 다 일이다. 기본 생활이 안 되면 편집자 생활을 영위할 수가 없다. 미래를 보장해줘야 직원이 남는다. 그 덕인지 20여명 직원들의 근속연수가 긴 편이다.


- 상대적 호황을 경험했던 기성 출판인과 불황의 늪에 빠진 젊은 세대 사이의 간극이 크다고 들었다.

▶생각 차이가 있다. 그때는 대개 젊은이들에게 결정권을 넘긴다. 성공의 기회도 중요하지만 실패의 기회를 주는 거다. 한번은 편집사원이 아이디어를 냈다. 딱 보니까 안 되겠더라. 그래도 그냥 해보라고 했다. 선임편집자가 뭐라고 하길래 ‘처음으로 아이디어를 냈는데 잘라버리면 앞으로 아이디어 안 낼 거다’라고 했다. 결국 했고 결과가 안 좋았다. 근데 실패하고 나더니 확실히 달라지더라. 다음 프로젝트에서 텀블벅 펀딩으로만 1억원을 넘게 모았다. 그릇을 깨본 사람이 소중함을 안다. 배짱과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


- 출판사 대표들이 공개 발언을 할 때 자기도 지키기 못하는 좋은 말만 한다는 지적이 있다. 신문에 기고할 때는 자사 출판사 신입직원 초봉을 병기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온다.

▶젊은 나이에 기회를 주면 잘하기 위해 노력하게 돼 있다. 경쟁 시키고 쥐어짜는 건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어서 그렇다. 직원을 쥐어짜면 100% 망한다. 오히려 서로를 신뢰하게 만들어야 전망이 있다.


- 그래서일까. 출판계를 떠나는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다.

▶아무리 책이 좋아서 출판사를 택했다지만 지치면 떠나게 되어 있다. 최근에는 스타트업으로 많이 간다. UX(고객이 이해하기 쉬운)글쓰기가 중요해지면서 편집자 수요가 많아졌다. 임금이 두 배 이상 오르는데 유혹이 크겠지. 출판사에 3년차 편집자 씨가 말랐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 그럼에도 1인 출판사 늘고 있다.

▶같은 맥락이다. 못 견디니까 나오는 거지. 출판사는 대형출판사 몇 개와 1인 출판사들만 살아남을 거다. 중간규모는 다 없어질 거다. 20년 사이 기존 출판사 절반이 사라졌다.


- 그런 상황에서 출판학교를 열었다.

▶상황이 어려워도 출판에 목을 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살아남아야 하는데, 급변하는 세상에 아이디어나 마케팅 방법을 상의하고 논의할 곳이 없다. 그런 구조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만들게 됐다.

[서믿음의 책담] “직원 쥐어짜면 망한다…실패의 경험 허락해야” 출판학교 수업


- 유료 모임인가.

▶무료다. 이윤을 취하지 않는다. 운영위원도 있고 강사도 있는데 다들 좋은 뜻으로 참여하고 있다. 지난 2일 열 명이 첫 수업을 시작했다. 마케터, 편집자 등의 강사진으로 이뤄진 커리큘럼으로 약 10주간 진행할 예정이다. 멘토 역할을 하겠다는 거다.


- ‘아무튼’ 시리즈, 지역서점의 연대처럼 출판사의 연대가 이뤄지는 건가.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책의 발견성을 키우는데 힘을 보태면 분명 시너지가 있을 거다. 지금도 서로 기획을 함께 하는 협력의 움직임이 보인다.


- 참가자 반응은.

▶경쟁률이 치열해 면접을 보고 뽑았다. 1시간가량 면접을 봤는데, 그것만으로도 너무 좋았다고 하더라. 그런 이야기를 나눌 곳이 없었다고... 강의도 그렇지만 뒤풀이를 하면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다.


- 기존 출판학교와 무엇이 다른가.

▶출판예비학교(SBI)는 출판 업자들이 직원을 뽑기 위해 만든 거다. 기본 소양 교육에 치중한다. 그래서 막상 출판사로 가면 적응하지 못해 떠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앞으로 입문자 과정도 만들 건데, 책을 기획해서 출간할 때까지 전 과정을 실무를 더해 가르칠 거다. 실제로 판매까지 이뤄지도록, 끝까지 함께할 거다.


- 출판사의 역할이 뭐라고 생각하나.

▶‘학교도서관저널’ 잡지를 12년 반 동안 냈다. 코로나가 오기 전에 2~3년차 교사 열 명을 모아 온라인 학습에 관해 조사를 하고 글을 쓰게 했다. 근데 갑자기 코로나가 터지니 온라인 수업으로 전환되면서 한 달 만에 집필이 됐다. 1만부가 넘게 나갔다. ‘학교도서관저널’은 교사들이 독자인데, 교사가 세컨드 크리에이터가 된 거다. 독자를 크리에이터로 만드는 것이 출판사가 해야 할 일이다. 요즘은 유명 작가가 직접 출판사 차리고, 하다못해 EBS까지 단행본 시장에 진출했다. 웹소설로 보면 국내에서 가장 큰 출판사는 네이버와 카카오다. 이젠 작은 시장을 노리고 능동적으로 할 수 있는 걸 찾아야 한다. 일을 저지르는 건 젊은 상상력이다. 그걸 돕기 위해 출판학교를 세웠다.


- 출판학교를 통해 기대하는 바는.

▶거대한 출판마케팅 플랫폼을 만들고 싶다. 힘을 모으면 국제도서전과 같은 행사를 자체적으로 상설 운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출판학교는 그 팬덤을 모으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 한기호 소장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이자 출판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격주간 출판전문지 '기획회의'를 1999년 2월에 창간해 지금까지 발간해오고 있다. 2010년 한국 최초의 민간 도서관 잡지인 월간 '학교도서관저널'을 창간해 학생들을 대상으로 책 읽기 운동을 벌이고 있다. 지은 책으로 '출판 마케팅 입문', '베스트셀러 30년', '새로운 책의 시대', '한기호의 다독다독', '20대, 컨셉력에 목숨 걸어라', '마흔 이후, 인생길', '나는 어머니와 산다', '우리는 모두 저자가 되어야 한다', '하이콘텍스트 시대의 책과 인간', '책으로 만나는 21세기' 등과 다수의 공저가 있다.




서믿음 기자 fait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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