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뉴욕=조슬기나 특파원] "오늘이 가장 싸다."
집값 얘기도, 명품 가격 얘기도 아니다. 한 여행 까페 게시판에서 당초 예산을 훨씬 웃도는 비싼 항공권 티켓을 당장 구입해야 할 지, 가격이 떨어지기를 기다려야 할 지 망설이고 있다는 글에 달린 댓글이다.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이후 억눌렸던 여행, 비즈니스 출장 수요가 폭발하면서 최근 항공권 가격은 고삐가 풀린 모양새다. 세계 대표 관광지로 손꼽히는 미국 뉴욕의 경우 국적항공기인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의 이코노미를 기준으로 한국행 왕복 항공권 가격이 이제 3000달러(약 380만원)에 육박한다. 코로나19 사태 이전인 2019년과 비교 해 두 배 수준이다.
팬데믹 기간에도 빈 자리를 찾기 어려웠던 비즈니스 항공권의 오름폭은 더 놀랍다. 뉴욕에 거주 중인 한 주재원은 최근 본사 회의를 위해 급히 항공편을 알아봤다가 비즈니스 기준 1만~1만5000달러(1269만~1903만원)를 지불해야 한다는 답변을 받았다. 현지에 단기 체류 중인 30대 여성 한 모씨 역시 조기 귀국 차 일정 변경을 문의했다가 한화로 100만원 이상을 더 낼 것을 요구 받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뉴욕, 뉴저지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아예 한국 방문 계획 자체를 미루기도 한다. 한 한인은 "올 봄에 가려다 한국의 코로나19 확산세 때문에 미뤘는데, 이번엔 항공권 값이 너무 부담된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올해 추석에 가족과 함께 서울을 찾으려고 계획했던 또 다른 한인도 "진작 비행기부터 예약할 걸 그랬다"고 고개를 내저었다.
이는 코로나19 방역조치가 완화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여행, 비즈니스 출장 수요가 폭발한 여파다. 팬데믹 기간 줄어든 항공편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티켓 가격이 급등한 것이다. 마스터카드 이코노믹스 인스티튜트의 '여행 2022년'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달 여행을 목적으로 한 전 세계 항공편 예약이 팬데믹 이전 대비 25% 급증하는 등 각지에서 여행 수요 회복이 확인되고 있다.
비대면으로는 소통에 한계가 있다고 느낀 기업들이 해외로 나서며 비즈니스 출장도 대폭 활발해졌다. 업계 1위인 아메리칸익스프레스 글로벌비즈니스트래블(아멕스GBT)은 최근 기업 출장 예약률이 코로나19 이전의 61% 수준까지 회복됐다고 밝혔다. 올해 초 오미크론이 확산하던 시기 25%였던 점을 감안하면 크게 회복된 수치다.
국제선만이 아니다. 미국 내 항공 요금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다. 4월 항공 요금 인상폭은 월간 기준 역대 최고치를 갈아 치웠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4월 미 항공 요금은 전월 대비 18.6% 올랐다. 이는 소비자물가지수(CPI) 통계 작성 이후 월간 기준 최대 폭이다. 전년 동기 대비로도 33.3% 뛰었다. 최근 미국내 인플레이션이 40여년만에 최고 수준임을 고려하더라도 놀라운 수준이다.
경제매체 CNBC는 최근 로스앤젤레스발 필라델피아행 왕복 항공편(이코노미)에 685달러를 지불한 데지리 앤더슨씨의 사례를 전하며 과거 동일 노선의 티켓은 320달러였다고 언급했다. 앤더슨씨는 "이 가격(685달러)이면 국제선 티켓을 살 수 있어야 한다"고 꼬집었다.
애트머스피어 리서치그룹의 헨리 하르트벨트 분석가는 "미국 내 여행수요는 급증하고 있지만 좌석 수는 팬데믹 이전보다 여전히 6% 줄어든 수준"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고유가로 부담이 커진 것은 소비자만이 아니라면서 항공유 가격 인상 부담, 부족한 인력과 높은 인건비 등이 모두 합쳐져 항공권 가격이 상승했다고 평가했다. 말 그대로 "시장이 작동하는 힘"이라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주요 지역에서 이러한 항공 수요가 올해 내내 탄탄하게 이어질 지, 꺾일 지는 아직 알 수 없다고 내다봤다. 코로나19 재확산 우려가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마스터카드 이코노믹스 인스티튜트는 통상 대다수 사람들이 에너지, 식비 등 인플레이션이 치솟을 때 여행에 지출하는 비용을 줄인다는 점도 지적했다. 다만 2년여간 팬데믹으로 억눌렀던 여행, 비즈니스 수요를 고려할 때 상당수가 "비싸도 살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한국 정부는 최근 국제선을 대폭 증편하는 내용의 대책을 내놨다. 이를 통해 항공권 가격을 안정화하고 수요 폭증에도 대응하겠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계획과 달리 실제 항공사들이 얼마나 증편할 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결국 한 번 오른 운임이 내려가기 까지는 상당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CNBC는 비싼 항공권으로 부담을 느끼는 이들에게 팬데믹 이전의 여행에서 비용 절감을 위해 '유연성'을 발휘했다면, 이제는 한층 더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스코트 칩 플라이트의 설립자인 스코트 키예스는 가능하면 여행을 미룰 것을 권했다. 그는 "국내 여행의 경우 1~3개월, 해외 여행의 경우 2~8개월 앞서 항공편을 예약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뉴욕=조슬기나 특파원 seul@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