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사와 기요시 감독 '스파이의 아내', 만주 731부대 전쟁범죄 파격 소재
전세계에 만행 고발하려는 유사쿠, 군국주의 신봉하는 분대장 다이지
지식인·군인 통해 본 日 1940년대, 여전히 허구 인물들 쫓는 모습도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영화 ‘스파이의 아내’에서 유사쿠(다카하시 잇세이)·사토코(아오이 유우) 부부는 무성영화를 만들어 송년회에서 공개한다. 가면 쓴 여인이 몰래 금고를 열다 남편에게 발각되는 내용이다. 남편은 한적한 창고에서 아내에게 총을 쏜다. 쓰러진 아내는 남편을 애절한 눈빛으로 바라보다 숨진다. 턴테이블에서 구슬픈 노래가 흘러나온다.
"속절없는 사랑이라도 기쁘기 짝이 없구나. 암울한 속세에 띄운 꿈의 나룻배. 덧없는 꿈은 공허하게 부서지나니 하염없는 눈물이 멎지를 않누나. 덧없는 사랑이여. 찰나의 연분이여. 애써 차분한 척 해봐도 타오르는 가슴 속 불길. 현세에서 나누는 환상의 입맞춤. 밀려오는 슬픔에 휩싸이는 이 내 몸."
‘스파이의 아내’의 전개를 예상케 하는 액자 영화다. 무역상 유사쿠는 사업차 찾은 만주에서 일본 관동군 731부대의 만행을 목격한다. 부조리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증거를 수집하고 국제 사회에 고발할 계획을 세운다. 이를 알아챈 사토코가 만류한다.
"당신은 매국노예요." "난 코스모폴리탄이야." "예?" "내가 충성을 서약한 건 국가가 아니야. 만국 공통의 정의야. 불의를 묵과할 수 없어." "동포 수만 명이 죽어도 그게 정의인가요? (...) 우리의 행복은요?" "불의에 기반한 행복에 만족해?" "저는 정의보다 행복을 원해요."
사랑 앞에서 이념과 사상의 갈등은 중요치 않다. 하지만 배경이 생존을 위협받던 1940년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유사쿠·사토코 부부는 운전기사와 하녀를 고용할 만큼 유복하다. 그러나 바깥 세상은 딴판이다. 중일전쟁 발발 뒤 국가 총동원체제가 강화됐다. 고노에 내각의 신체제 선언과 더불어 강력한 고도국방국가를 지향하는 통제체제가 형성됐다.
사토코를 흠모하는 다이지(히가시데 마사히로)는 그런 사회가 낳은 괴물처럼 나타난다. 사석에서도 군대정신을 잃지 않는 분대장이다. 따뜻하게 응대하는 사토코에게 서구 복장과 위스키를 지적하며 체제 비판의 여지가 있다고 지적한다. 정치적 통제가 단순한 지배보다 절실한 생활적 요구에서 비롯된다고 믿는다. 전쟁과 그 준비 자세를 최상위에 놓고 모든 생활 영역을 이에 종속시키는 군국주의 신봉자다.
정치가 그의 문화와 사상을 지배한 걸까. 구로사와 감독은 정반대로 본 듯하다. 롱테이크로 촬영한 두 장면으로 통제 문화·사상의 정치 지배를 가리킨다. 군인들의 열병을 지켜보는 민간인들의 모습이 그것. 일부가 "만세"를 외치며 반기지만 나머지는 멀뚱히 쳐다보거나 그냥 지나친다.
후자인 유사쿠가 군국주의 속에서 코스모폴리탄이 된 건 단순히 무역상으로 활동해서가 아니다. 자유주의·데모크라시·교양주의 등으로 요약되는 다이쇼기 사상은 일본이 러일전쟁 승리 후 국제적 지위를 확립하고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이룩하면서 형성됐다. 근대적인 공교육제도가 확립되고 지식 습득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신칸트주의적 문화주의 철학이 뿌리내려 세계시민적 개인이라는 자각이 등장했다.
구로사와 감독은 제국주의적 성장과 자유주의적 지식인의 등장이라는 역설적 흐름을 다이지와 유사쿠로 대변해 보여준다. 자유주의적 지식인들은 일본에서 민본주의 확립과 자유로운 개인의 권리 확대를 가능하게 하는 사상적 기반 마련에 성공했다. 그러나 아시아로 시야를 넓히면서 특권의 공급처인 제국주의적 폭력과 식민주의의 현실에 대해 직시하게 됐다. 이들은 사상의 치명적인 모순을 인정해야 했다. 폭력과 살육의 대가로 특권을 누리면서 동시에 이를 부정해야 하는 이율배반의 상황에 놓였다.
당사자와 관조자, 노동과 유희, 관심과 무관심의 세계가 충돌하는 상황에서 유사쿠도 자신의 위치를 인식한다. 그는 한계를 뛰어넘고자 망명을 계획한다. 하지만 대다수는 역설적인 상황에 등 돌리고 호의호식하다 전후 피해자의 얼굴을 보였다. 폭력에 굴복했다는 사실만으로 부끄러운 과거가 그렇지 않게 됐다고 착각하거나 그런 척했다. 달라진 상황에서 흉포한 군인들이 물러났을 때 민주주의를 입 밖에 내기만 하면 됐다. 그렇게 다른 민족에 대한 쓰디쓴 가해의 기억은 엷어져 갔다.
극 후반 사토코가 다이지에게 건네는 간청은 잊힌 기억을 소환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당신 본성은 자상함이에요. 난 그걸 알아요. 그런 당신에게 대단한 권력이 주어졌죠. 시대가 당신을 바꾼 거라면, 당신이 그 시대를 바꿀 수도 있잖아요." 다이지는 여전히 허구의 인물들을 쫓고 있다. 액자 영화 속에 갇혀….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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