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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철거한 일제의 '총독부' 건물, 대만은 왜 계속 사용할까?

수정 2019.03.01 08:00입력 2019.03.01 08:00

현 대만총통부, 1919년 지어진 대만총독부 건물 그대로 사용
조선과 달리 문관통치, 국민당 정부 탄압에 오히려 일제강점기가 미화


오늘날 대만총통부로 쓰이고 있는 옛 일제의 대만총독부 건물 모습. 우리나라에서 3.1운동이 있었던 1919년 건립됐다.(사진=대만총통부 홈페이지/www.president.gv.tw)

[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 대만의 수도 타이베이 시내를 관광하다보면, 우리의 청와대 격인 총통 관저로 쓰이는 '대만총통부' 건물을 만날 수 있다. 높은 중앙탑이 인상적인 이 건물을 다른 고층빌딩에서 내려다보면 '날일(日)'자 형태로 만들어진 건물임을 알 수 있다.


왜 그런 형태로 만들어졌는지는 이 건물의 건립연도를 보면 바로 추정이 가능해진다. 이 건물은 우리나라에서 한참 3.1운동이 벌어졌던 1919년 세워졌다. 당시 대만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제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었고, 이 건물은 원래 일제의 대만총독부로 세워진 건물이었다. 1926년 세워진 조선총독부 건물 역시 이 대만총독부처럼 날일자 형태로 만들어졌다.


형태는 비슷했지만, 두 총독부 건물의 운명은 달랐다. 우리나라에서는 광복 후 지난 1995년, 조선총독부 건물을 허물고 경복궁 복원에 나섰지만, 대만은 여전히 이곳을 총통부 건물로 사용한다. 대만 내에서는 총통부 건물을 이전하자는 이야기는 있지만, 철거여론은 아직까지 없었다. 오히려 야경이 멋진 관광명소이자 근대 문화재로 소개돼있다.


위에서 바라보면 날일(日)자 모양으로 보이는 대만총독부 건물. 이 디자인은 후에 1926년 조선총독부 건물을 세울 때도 동일하게 적용됐다.(사진=두산백과)

우리에게는 분노를 유발시키며 지우고 싶은 치욕적인 '식민잔재'를 대만에서 이처럼 다르게 받아들이는 이유를 알기 위해선 대만의 일제강점기를 살펴봐야한다. 대만은 우리보다 일제강점기가 15년 길었다. 대만은 공식적으로 1895년, 청일전쟁의 결과로 일본이 완전 점령하면서 1945년까지 반세기동안 식민통치를 겪었다. 식민통치가 길었던만큼 우리나라보다 반일감정이 더 많을 것 같지만, 오히려 대만의 반일감정은 우리나라만큼 심하지 않다.

물론 대만에서도 일제강점기 때 결코 저항이 작지 않았다. 1895년 일본의 강제점령 당시에는 청나라 출신 관료들이 저항운동을 벌였고, 일본군이 내부 산악지대로 쳐들어오면서 원주민들도 강하게 저항했다. 일제강점기 초기 5년간 대만주민 3000여명이 사형당할 정도로 강경한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기에는 대만에서만 무려 20만명 이상이 강제 징병돼 동남아시아 전선으로 끌려갔고, 3만명 이상이 전사하기도 했다. 일제에 이를 갈만큼 당한 셈이다.


하지만 일본의 대만통치는 태평양 전쟁 말기를 제외하면 조선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됐다. 대만은 일본의 첫 대외식민지이자 아시아국가 중 최초로 제국주의 국가에 편입된 일본 입장에서 대외적으로 자신들의 식민통치를 자랑하기 위한 창구와도 같은 곳이었다. 이토 히로부미 역시 "대만의 통치에 실패하면 히노마루 깃발의 빛은 실추한다"며 대만통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에따라 대만에는 초기 5년과 태평양전쟁기를 제외하고 군인이 아닌 민간 정부출신의 총독이 파견됐다.


일제강점기 당시 대만총독부 건물의 모습(사진=대만총통부 홈페이지/www.president.gv.tw)

대만에 파견된 일본의 공무원들은 이곳에 설탕사업, 아편전매사업 등 각종 상품성 작물 재배를 통해 경제적 자생력을 키웠고, 일본 본국의 예상을 뛰어넘어 편입 10년만에 재정자립에 성공했다. 더구나 일본 정부는 조선을 식민지화한 이후 대만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전쟁 전까지 조선처럼 대규모 양곡 수탈이 있던 것도 아니었고, 토지조사사업 등으로 원주민들의 땅을 뺏거나 개발사업을 대규모로 일으킬 것이 없었다. 양자간에 경제적으로 원한이 생길 일이 별로 없었던 것.


더구나 일본이 점령하기 전에 이곳을 지배했던 청나라 역시 대만 원주민 입장에서는 같은 외부 침략자에 불과했고, 별도 국가나 민족주의가 형성되지 않았던 곳이었다. 역사시대 동안 일본을 자신들보다 한 수 아래로 생각해온 우리나라와는 입장이 전혀 달랐던 셈이다. 청나라 출신의 몇몇 관료들을 제외하면 중국인의 숫자도 매우 적었고, 이들 역시 본토로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오히려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들어온 중국 국민당의 무자비한 통치가 이어지면서 결정적으로 대만에서는 일제강점기가 상당히 미화됐다. 국민당은 1949년 국공내전에서 최종 패배, 대륙에서 쫓겨나 대만으로 들어오면서 이곳이 원주민들을 크게 탄압했고 반일과 반공을 기치로 독재정치를 폈다. 일제가 남긴 대만총독부 건물이 여전히 총통부로 사용되는 것에는 대만이 겪은 또다른 역사적 트라우마가 숨어있는 셈이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전문] 北리용호 "이런 기회마저 다시 오기 힘들 수 있다"
수정 2019.03.01 08:45입력 2019.03.01 08:45
리용호 북 외무상 (사진=연합뉴스)

리용호 북한 외무상과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이 1일(현지시간) 베트남 하노이 시내 멜리아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2차 북미정상회담이 결렬된 데 대한 북한의 입장을 발표했다.


북한의 입장은 민생과 관련된 부분만 제재를 해제할 것을 요구했지만 미국이 영변지구 핵시설폐기 조치 외에 한 가지를 더 해야 한다고 끝까지 주장해 협상이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리 외무상은 "현 단계에서 우리가 제안한 거 보다 더 좋은 합의가 이뤄질 수 있는 건지 말하기 힘들다"며 "이런 기회마저 다시 오기 힘들 수 있다"고 했다.


다음은 기자회견 발언 전문이다.


▲리용호 외무상

이번 2차 조미수뇌상봉 회담 결과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알려드리겠다. 조미 양국의 수뇌분들은 이번에 훌륭한 인내력과 자제력을 가지고 이틀간에 걸쳐서 진지한 회담을 진행했다. 우리는 지난해 6월 싱가포르 회의 중 1차 조미수뇌상봉회담 공동인식으로 이룩된 신뢰조성과 단계적 해결 원칙에 따라 이번 회담에서 현실적 제안을 제기했다.

미국이 유엔 제재의 일부, 즉 민수경제와 인민생활에 지장을 주는 항목의 제재를 해제하면 우리는 영변 핵의 플루토늄과 우라늄을 포함한 모든 핵물질 생산시설을미국 전문가들의 입회하에 두 나라 기술자들의 공동의 작업으로 영구적으로 완전히 폐기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전면적인 제재 해제 아니고 일부 해제, 구체적으로는 유엔 제재 결의 11건 가운데 2016년부터 2017까지 채택된 5건, 그 중 민수경제와 인민생활에 지장을 주는 항목들만 먼저 해제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조미 양국 사이의 현 신뢰 수준을 놓고 볼 때 현 단계에 우리가 내 짚을 수 있는 가장 큰 보폭의 비핵화 조치이다.


우리가 비핵화 조치를 취해나가는 데서 보다 중요한 문제는 안전담보 문제이지만 미국이 아직은 군사 분야 조치 취하는 것이 부담스러울 것이라 보고 부분적 제재해제를 상응 조치로 제안한 것이다.


이번 회담에서 우리는 미국의 우려를 덜어주기 위해서 핵실험과 장거리 로켓 시험 발사를 영구적으로 중지한다는 확약도 문서 형태로 줄 용의를 밝혔다.


신뢰조성 단계를 거치면 앞으로 비핵화 과정은 더 빨리 전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회담 과정에 미국 측은 영변 지구 핵시설 폐기 조치 외에 한 가지를 더 해야 한다고 끝까지 주장했으며 따라서 미국이 우리의 제안을 수용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현 단계에서 우리가 제안한 거 보다 더 좋은 합의가 이뤄질 수 있는 건지 이 자리에서 말하기 힘들다. 이런 기회마저 다시 오기 힘들 수 있다.


완전한 비핵화에로의 여정에는 반드시 이러한 첫 단계공정이 불가피하며 우리가 내놓은 최대한의 방안이 실현되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할 것이다. 우리의 이런 원칙적 입장에는 추호도 변함이 없을 것이며 앞으로 미국 측이 협상을 다시 제기해오는 경우에도 우리 방안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이상이다.


▲최선희 외무성 부상 발언 요약

영변 지구와 관련해서 이번에 우리가 내놓은 안은 우리 외무상이 밝힌 바와 같이 우리는 영변 핵단지 전체, 그 안에 들어있는 모든 플루토늄 시설, 모든 우라늄 시설을 포함한 모든 핵시설을 통째로 미국 전문가들의 입회하에 영구적으로 폐기할 데 대한, 그런 역사적으로 제안하지 않았던 제안을 이번에 했다. 그 대신 우리가 미국측에 요구한 것은 외무상 동지가 밝힌 바와 같이 제재 결의중에서 민생용, 민수용제재 다섯건에 대해서 해제할것을 요구했다.


이러한 제안에 대해서 미국측이 이번에 받아들이지 않은것은 천재일우의 기회를놓친 것이나 같다고 저는 생각한다. 민생과 관련해서는 우리가 제안한 다섯개 제재 결의에서, 군수용은 우리가 아직까지는 요구하지 않는다. 민생과 관련해서, 인민생활, 경제발전과 관련된 부분에 대한 사항들의 제재 해제를 요구했을 뿐이다.


2016년부터 취한 대조선 결의에서, 2270호 2375호 등 다섯 개인데 이 가운데서도 100%가 아니고 여기에서 민생과 관련된 부분만 제재를 해제할 것을 요구했다. 우리가 제안한 것은 영변 핵단지 전체에 대한 영구적 폐기다. 여기에서 실행할때에는 미국 핵전문가들이 와서 입회하게끔 되어 있다.


이번에 제가 수뇌회담을 옆에서 보면서 우리 국무위원장 동지께서 미국에서 하는 미국식 계산법에 대해서 좀 이해하기 힘들어하시지 않는가 이해가 잘 가지 않아 하는 듯한 그런 느낌을 받았다.


앞으로 이렇게 지난시기 있어보지 못한 영변 핵단지를 통째로 폐기할데 대한 그런 제안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민수용 제재결의의 부분적 결의까지 해제하기 어렵다는 미국측의 반응을 보면서 우리 국무위원장동지께서 앞으로의 이런 조미거래에 대해서 좀 의욕을 잃지 않으시지 않았는가 하는 이런 느낌을 제가 받았다.


다음번 회담이 정해진 것은 없다.


한가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미국의 핵박사 지그프리드 헤커 박사가 영변 핵시설에 있는 농축 우라늄 공장을 와서 방문한 적이 있다. 그러한 공장까지도, 거대한 농축 우라늄 공장까지 포함한 모든 핵시설을 우리가 이번에 영구적으로 되돌릴 수 없게 폐기할데 대한 제안을 내놨지만 여기에 대한 미국측의 대답이 호응이 없었다. 그래서 앞으로 이러한 기회가 다시 미국측에 차려지겠는지(마련되겠는지), 여기에 대해서는 저도 장담하기 힘들다.




김철현 기자 kc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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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태·이제훈, ‘제100주년 3·1절 기념식’ 독립선언서 낭독
수정 2025.01.22 22:00입력 2019.03.01 11:48
제100주년 3.1절 기념식 생중계 / 사진 = YTN 캡쳐

[아시아경제 김지현 인턴기자] 삼일절 맞아 열린 ‘제100주년 3·1절 기념식’에서 배우 유지태와 이제훈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해 화제다.


1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이 행사에서 문재인 대통령 뒤에서 태극기를 함께 든 채로 등장한 유지태와 이제훈은 국민대표들과 같이 독립선언서 낭독문을 읽었다.


유지태와 이제훈뿐만 아니라 배우 차지연, 이새봄, 박자희, 스포츠 해설가 차범근, 래퍼 치타 등이 낭독에 참여했다.


오전 11시부터 생중계된 이 기념식에서는 독립 유공자를 비롯해 각계각층의 국민대표들이 모여 한 구절씩 조선 대표 33인의 독립선언서를 읽었다.

현장 사람들은 엄숙한 분위기에서 담담하면서도 굳센 의지를 가지고 행사에 참여했다.






김지현 인턴기자 jihyunsport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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