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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규의 야구라는 프리즘]WBC 국대팀에 日 국적 선수가 뽑힌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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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조부모·출생지 기준으로 WBC 측 "선수가 대표팀 선택"
KBO 전원 한국 국적 선수로만 "순혈주의에서 벗어나겠다"
허구연 신임 KBO 총재 선언…다국적 국가대표팀 가능해져

[최민규의 야구라는 프리즘]WBC 국대팀에 日 국적 선수가 뽑힌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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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덕(86) OB 베어스 초대 감독은 현역 시절 엄청난 오른손 투수였다. 1964년 해운공사에서 한국 실업야구에 데뷔했다. 255이닝을 던졌는데 평균자책점이 무려 0.32였다. 타자로도 타율 3할(6위)에 홈런 네 개(공동 2위)를 때려낸 ‘이도류’ 스타였다. 9월 25일에는 육군 용산구장에서 철도청을 상대로 한국 성인야구 두 번째 퍼펙트게임 기록도 세웠다. 그해 나이는 스물여덟 살. 일본 가나가와현에서 태어난 재일동포인 그는 ‘가네히코 다카시게’라는 등록명으로 일본프로야구 난카이 호크스에서 8년을 뛰었다. 국내 선수들과는 수준이 달랐다. 김영덕은 2007년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한국 야구에서 슬라이더는 일본 사회인야구 야시카카메라 출신 재일동포 신용균이 처음 던진 것으로 안다. 포크볼과 싱커를 던진 투수는 아마 내가 처음일 것”이라고 회상했다.


한국 실업야구를 택한 계기는 1963년 9월 서울에서 열린 제4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였다. 지금은 고교, 대학 유망주로 대표팀을 꾸려 출전하는 대회다. 당시에는 한국 야구가 우승에 도전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위상의 국제무대였다. 한국은 이 대회에서 1차 리그 3전 전승, 2차 리그 2승 1패로 대회 첫 우승을 차지했다. 해방 뒤 첫 국제대회 우승이었다. 특히 사회인야구 우승팀 세키스이화학 선수들이 주축이 된 일본에 1차 리그 5-2, 2차 리그 3-0 전승을 거뒀다. 해방 뒤 일본을 상대로 처음 거둔 승리였다. 한국의 첫 우승과 첫 일본전 승리는 당시 일본 언론에도 보도됐다. 난카이에서 선수 생활 말년을 보내던 김영덕도 뉴스를 접했다. ‘한국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일본 야구계에선 프로와 아마추어의 갈등으로 프로 출신이 사회인야구에서 뛸 수 없었다. 그는 도에이 플라이어스에서 뛰던 경동고 출신 백인천의 주선으로 한국 무대를 밟았다. 그리고 이듬해 실업야구를 정복했다.


1965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제5회 대회를 앞두고 김영덕에 대한 기대는 컸다. 하지만 정작 김영덕은 한 경기도 등판하지 못했다. 이 문제로 대한야구협회는 대회 뒤 대한체육회로부터 진상조사 지시까지 받았다.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대회 사흘째인 12월 6일 김영덕은 여권 만료 문제가 생겨 일본으로 출국했다. 당시 재일동포는 일정 기간 국내에 머무른 뒤 다시 일본에 입국해야 하는 제약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애매한 부분이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경기인 일본전은 12월 4일 첫 경기로 잡혀 있었다. 일정상 등판이 가능했다. 야구협회가 체육회에 보낸 보고서에는 “합숙 중에 허리 통증이 재발했다”고 쓰여있다. 하지만 김영덕은 다른 이야기를 했다. 일본 선수단에서 “프로 출신 김영덕은 부정선수”라며 이의를 제기했다는 것이다. 프로와 아마추어 경계가 명확했던 당시 김영덕의 선수 신분은 논란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한국 선수단에선 일본프로야구 출신 투수 유완식과 포수 장석화가 해방 뒤 귀국해 1954년 1회 대회에 대표팀으로 출전한 전례를 우선했을 가능성이 있다.


한국 야구의 위상은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올라갔다. 1960년대에는 아시아야구선수선수권 대회 우승이 최대 목표였다. 지금은 최상위 국제대회인 올림픽과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제패를 노린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우승을 차지했고, 내년 3월 예정된 WBC에서 4강 복귀를 노린다. 올림픽에서 프로선수 출전이 가능해진 지 오래됐고, WBC는 부모·조부모·출생지 기준으로 선수가 대표팀을 선택할 수 있다. 중국 지린성 출신 주권(KT)이 2017년 WBC에서 중국 대표로 출전한 사례가 있다. 일본프로야구 구단들도 외국 협회에서 차출 요청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응한다는 방침이다.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마무리 야마사키 아스아키, 요미우리 자이언츠 왼손투수 도네 치아키 등은 필리핀 대표팀 발탁 가능성이 나오고 있다. 두 선수는 어머니가 필리핀인이다.


WBC 선수 선발을 관장하는 한국야구위원회(KBO)는 지금까지 한국 국적 선수들로만 대표팀을 구성했다. 하지만 허구연 신임 총재는 “순혈주의에서 벗어나 (국적이 다른) 한국계 선수도 뽑을 수 있다”는 전향적인 입장이다. 데인 더닝(텍사스), 미치 화이트(LA 다저스), 토미 에드먼(세인트루이스) 등이 거론된다. 거의 거론되지 않은 이름이 있다. 김영덕이 뛰었던 난카이의 후신인 소프트뱅크 호크스에는 한국계임이 공개된 유능한 외야수가 있다. 올해 스물일곱 살인 우에바야시 세이지다. 2014년 소프트뱅크에 입단해 2018년 OPS 0.803에 22홈런, 리그 최다인 3루타 열네 개를 때려냈다. 수비력이 매우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우에바야시는 한국인 어머니와 일본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른바 ‘뉴커머(해방 이후 일본에 정착한 한국인)’인 어머니는 도쿄 인근 사이타마시에서 한국음식점을 경영하고 있다. 소프트뱅크는 3군 선수단을 2012년부터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인 2019년까지 한국에 파견해 KBO리그 2군 팀들과 번외경기를 치러왔다. 우에바야시도 3군 시절 한국에서 뛰었다. 일정이 끝난 뒤엔 한국 친지들을 찾아 인사하기도 했다. 일본야구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우에바야시도 자신이 WBC 한국 대표 출전 자격이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우에바야시는 일본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은 적이 있다. 프로 유망주 선수들이 참가하는 2017년 아시아프로야구챔피언십(APBC) 개막전에서 한국 투수 함덕주에게 연장 10회말 동점 스리런 홈런을 날렸다. 한 번은 아버지 나라, 다른 한 번은 어머니 나라의 유니폼을 입는다면, 유쾌한 상상이다. 우에바야시는 지난 세 시즌 동안 1할대 타율로 부진했으나 올해는 서른세 경기에서 타율 0.301로 살아났다. 하지만 5월 18일 경기 전 훈련에서 불행하게도 아킬레스건을 다쳤다. 시즌 중 복귀 가능성은 미지수다.


일본에서 한국계 선수 몇 명이 지금 현역으로 뛰고 있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우에바야시처럼 공개적으로 한국계임을 밝히는 선수는 드물다. 1965년 대표팀 외야수였던 박영길 전 롯데 감독은 “과거보다 차별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한국계임을 밝히기 부담스러워하는 재일동포 선수가 많다”면서도 “기량이 뛰어나고, 선수 자신이 원한다는 전제라면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KBO 고위 관계자는 “일본에서 뛰고 있는 선수에게도 대표팀 문이 열려 있다. 물론 선수 의사를 존중하는 게 우선”이라고 밝혔다.


한국 야구는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재일동포선수를 받아들였다. 1959년 일본에서 열린 3회 대회에서 한국은 일본에 1-20, 1-7 스코어로 일방적으로 패했다. 1962년 4회 대회에서도 2전 전패였지만 0-2, 1-2로 점수 차는 줄었다. 두 경기에서 맹활약했던 왼손 투수가 재일동포 김성근이었다. 1963년 대회 일본전에선 잠수함 신용균이 1차전 완투, 2차전 완봉으로 승리의 주역이 됐다. 국제대회 성과에 앞서 한국 야구의 질적 발전에 재일동포 선수 역할이 컸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 뒤에는 김일융, 장명부, 김기태 등 일본프로야구 타이틀홀더 출신이 활약했다. 재일동포 선수 영입은 1985년 플라자 합의 뒤 엔화 가치 상승으로 한·일 프로야구 간 연봉 격차가 커져 퇴조했다. 하지만 KBO는 1998년부터 외국인선수 제도를 도입하며 더 큰 문을 열었다. 세계와 교류하면서 더 커져온 게 한국 야구의 역사다. WBC 대표팀 구성에 대한 KBO의 달라진 입장은 이 역사에 맥이 닿는다. 그리고 지금은 1960년대보다 더 다양한 ‘한국인’들이 한국과 세계에서 살고 있다. ‘다국적 야구국가대표팀’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이유다.



한국야구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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