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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2도]로봇·외계인 때려 부수는 신파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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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상호 감독 영화 '정이' SF 외피 헐거워
신파 내피 훤히 드러나…AI 정의부터 오류
학습·논의 없어 철학·성찰·비전 기대 어려워

넷플릭스 영화 '정이'의 뼈대는 공상과학이 아니다. 한국 멜로드라마의 뿌리인 신파다. 애틋한 모녀 관계의 단절이 주를 이룬다. 연상호 감독은 "딸이 어쩔 수 없이 엄마에게 이별을 고하는 모습을 생각하며 이야기를 썼다"라면서 "SF라는 낯선 장르로 풀어낸다면 전달 방식이 평이하지 않을 듯했다"라고 말했다. "'부산행(2016)'에 수안(김수안)이 아빠 석우(공유)에게 '가지 말라'면서 울부짖은 장면이 있다. 촬영하면서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선호하지 않던 신파가 다르게 느껴졌다. 어떻게 하면 잘 표현할 수 있을지 연구하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그렇게 만든 작품들이 하나같이 비판받았다. 신파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연출이 서툴렀을 뿐이다."


[영상2도]로봇·외계인 때려 부수는 신파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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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감독의 고백대로 신파는 죄가 없다. 감동과 정화를 효과적으로 일으키는 매커니즘일 뿐이다. 적절하게 스며들면 더없이 좋은 흥행 코드가 된다. 통섭과 융합은 온전히 연출자의 몫. 반전이나 극단적 감정에 지나치게 기대면 어김없이 비판이 날아든다. '정이'는 얼핏 보면 거리를 둔 듯하다. 주연한 고 강수연의 연기가 심심해 보일 만큼 차분하다. 연 감독이 절정까지 감정 억제를 주문했다고. 문제는 SF로 무장한 외피다. 너무 헐거워서 신파의 내피가 훤히 드러난다.


디스토피아라고 우기는 배경 설정부터 안이하다. 극 초반 김상훈(류경수) 연구소장의 설명만 들으면 거창한 난국이다. "스페이스 쉘터 8호, 12호, 13호가 스스로를 아드리안 자치국이라고 선포하면서 내전을 일으키며 지구를 위협하고 다른 쉘터들의 위협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연합군과 아드리안과의 전쟁이 40년간 이어지고 있습니다." 영화에서 연합군과 아드리안의 전투는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주요 무대인 연구소도 전시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여유롭다. 새로운 병기 개발이 절실해 보일 리 만무하다.


정이(김현주)를 최고의 전투 지휘 인공지능(AI)으로 개발하는 과정도 모순투성이다. '엣지 오브 투모로우(2014)'처럼 시뮬레이션 전투를 거치는데 학습 누적, 무기 교체, 복수 투입 등이 배제돼 있다. 부대를 통솔하거나 전략을 세우는 모습도 전무하다. 애초 인간의 형상·전투법·충성심·의지 등을 내세워 기계에 맞선다는 구상부터 설득력이 떨어진다. 연 감독은 "게릴라전이 중요해진 시대에서 기계는 해킹 기술 발전으로 부적합하다고 판단했다"라고 해명했다.


[영상2도]로봇·외계인 때려 부수는 신파의 힘

설명대로라면 정이는 AI라고 불릴 수 없다. AI(Artificial Intelligence)는 인간의 지능이 가지는 학습, 추리, 적응, 논증 따위의 기능을 갖춘 컴퓨터 시스템. 인간의 타고난 지능(Natural Intelligence)과 전혀 다른 개념이다. 정이는 지극히 후자에 속한다. 시뮬레이션 전투에서 고통을 느끼고 전투 의지가 오르락내리락한다. 멜로드라마의 중심을 이루는 모성도 드러낸다. 뇌 활성화 분석 지도에서 '미확인 영역 증가 중'이라는 표시와 함께 노란색으로 표시되기까지 한다. 신파가 SF의 외피를 집어삼킨 셈이다.


'정이'만의 문제는 아니다. 한국 SF 영화 상당수가 신파에 기대어 SF 장벽을 뛰어넘는다. 지난해 개봉한 '와계+인' 1부만 해도 외계인인 가드(김우빈)와 문도석(소지섭)의 결투에서 인간인 이안(최유리)의 절박한 심정이 전세 역전의 동력으로 작용한다. "감정은 놀랍구나. 전투에서 이길 확률 2%, 3%, 이제 4%." 사실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작가·감독 대부분은 첨단 기술 관련 지식이나 실험실에서 연구한 경험이 없다. 이야기 전복을 우려해 전문가 의견도 충분히 수용하지 않는다. 결과물에서 어떤 철학도, 성찰도, 비전도, 기술도 제시할 수 없다.



[영상2도]로봇·외계인 때려 부수는 신파의 힘

미국 할리우드에서는 끊임없는 학습과 논의로 픽션과 논픽션의 간극을 좁혀간다. '인터스텔라(2014)'가 대표적인 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동생인 조너선 놀란은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수업을 4년간 청강하며 물리학과 상대성 이론을 공부해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강단에 오른 교수는 2017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킵 손. 형제의 노력에 반해 자문은 물론 제작까지 참여했다. 넷플릭스 시청 순위 1위에 취한 지금의 충무로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모습이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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