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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대립이 만든 경계선…그 길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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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문화인류학자·저널리스트
아포가 만난 경계인의 모습들
서로에 대한 이해를 포기할 때 갈등
정체성을 둘러싼 아시아 곳곳의 고민들 담겨
'갈등의 해결책'은 결국 만남과 대화

[아시아경제 나주석 기자] 휴가철이 다가왔지만 해외여행은 언감생심인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일상에서 벗어나 휴식을 찾으려는 것이 해외여행의 이유였다. 이 과정에서 국경 너머 우리가 아닌 '그들'과 소통할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요즘 국경 너머에 대한 공포가 커진 것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이 안겨준 또 다른 후유증이다.

갈등·대립이 만든 경계선…그 길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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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경계선'은 이제 좀처럼 오가기 어려워진 국가 간, 민족 간 경계를 넘나드는 것에 관한 이야기다. 저자는 대만의 문화인류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인 아포(阿潑). 그는 동아시아 일대 국가와 국가 사이의 경계선, 국가 내부의 경계선도 오가며 겪은 경험으로 책을 펴냈다.


'슬픈 경계선'은 여행 과정에서 겪은 경험과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주축을 이룬다. 하지만 여행의 정취나 감상은 찾아보기 어렵다. 대신 인류학이 전면에 나서 여행으로 접할 수 있던 다른 국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체성을 주목한다.


우리는 대개 '우리와 그들' '나와 너'라는 이항대립 관계로 경계선을 긋는다. 정체성이라는 이 개념은 나라는 존재에만 머물러 있거나 우리라는 틀 속에 머물 때면 좀체 확인하기 어렵다. 너 또는 그들이라는 타자와 마주 설 때 정체성은 오히려 선명해지는 듯하다.


이처럼 우리와 그들이라는 대립 구도의 경계선 위에 놓인 사람들이 '슬픈 경계선'의 주제다. 따라서 동남아시아 곳곳에서 드러난 종족 문제, 소수민족, 이들의 정체성을 관찰하면서 드러난 저자의 정체성 개념이 책의 주요 축이다.


정체성이라는 문제는 결코 간단한 게 아니다. 중국에서조차 사라져버린 전통문화의 틀을 유지하며 사는 화교가 존재한다. 종족적 정체성은 억누른 채 자기가 속한 나라의 정체성을 우선시하는 이도 있다. 다양한 정체성이 혼재하는 가운데 사람들은 모호한 경계선에서 살아간다. 조선족은 한국과 중국의 국가대표 축구 대항전에서 한국팀을 응원할까, 중국팀을 응원할까. 이로써 조선족의 정체성을 가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뒤 미군에 점령당한 오키나와가 일본 복귀를 선택한 것은 조국의 품이 그리워서가 아니라 모욕적인 식민 통치의 대안을 찾는 과정이었다는 해석도 있다. 식민지로 대하는 미국이 싫어 일본을 선택했을 뿐 좋아서 일본인이라는 정체성을 선택한 것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오키나와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지난 시절과 오늘날의 아픔에 대한 이해가 동반되지 않는다면 일본인이자 오키나와인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기란 어렵다.


중국인도 영국인도 아닌 홍콩인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정체성을 둘러싼 설명도 인상적이다. 저자는 "중국 전역, 심지어 전 세계 어느 화교 지역권을 가도 '자본주의가 발달된 공리사회의 백년 식민지'로 무시당하는 이곳 홍콩처럼 자신과 무관한 민주주의 사산아(1989년 6월4일 톈안먼 사태)를 고집스럽게 기억하는 곳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라고 소개한다. 책에는 톈안먼 사태 20주년을 맞아 거리로 쏟아져 나온 홍콩인들의 모습, 이들이 해마다 6ㆍ4에 대한 기억을 자기 정체성으로 간직하고 있다는 내용도 나온다.


홍콩인들은 톈안먼 사태 당시 거리로 나섰다. 이후에도 해마다 6월4일이면 거리에서 당시 희생된 이들을 기린다. 중국인의 정체성이 아닌 홍콩인의 가치관과 정체성이 거리에서 형성된 셈이다. 홍콩인들은 송환법이나 국가보안법 같은 정치적 사안이 불거질 때마다 민주주의를 외치며 일어선다. 이런 모습 역시 톈안먼 사태를 자기의 정체성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가 홍콩인들의 이런 정서에 왜 부담을 느끼는지, 폭압에도 홍콩인들이 왜 일어서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정체성은 여전히 모호한 존재다. 중국인임을 자각하는 화교와 그렇지 않은 화교가 동남아 각국에 산재한다는 것이 단적인 예다. 드러난 모습은 제각각이지만 정체성이 개개인을 규정하는 영향력은 아직 남아 있다. 이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초기 화교 이민자의 문화와 언어는 여기서 국물 위에 뜬 기름기와 같다. 실제로 먹을 수 있는 게 아니라 그저 역사적 유물로서 국물 위에서 겉도는 것이다. 그것은 얼핏 하나가 된 듯해 보여도 결국엔 녹아들지 못했고, 그렇다고 말끔하게 걷어내지도 못했다."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역사와 개인 삶의 경험 속에서 정체성은 다양한 층위를 지닌 형태로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정체성이 끈덕지지만 단지 특정 국가의 국민이나 종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충돌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서로에 대한 이해를 포기할 경우 정체성 충돌은 갈등으로 이어진다. 갈등의 해결책은 결국 서로 마주함이다.


"그러한 상호작용은 내가 보고 들은 경험들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면서 어떤 울림을 만들었고 자극을 줬다. 그 과정에서 나는 타인을 이해하는 일을 겁낼수록 편견과 폭력이 복제되어 퍼져 나가고 대물림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심리적 경계를 강화할수록 갈등은 반드시 생겨나게 된다."


코로나19로 하늘길ㆍ바닷길이 좁아져 이제 '그들'을 마주하기가 어려워진 오늘날, 소통의 문턱이 한층 높아진 경계선은 더욱 슬퍼진다.



슬픈 경계선/아포 지음/김새봄 옮김/추수밭




나주석 기자 gongga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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