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배우 안성기가 떠났다. 빈소 한가운데 '기쁜 우리 젊은 날'의 순수했던 흑백 영정사진의 미소로 남은 사람. 영결식 날, 그가 남긴 옛 편지를 아들 다빈씨가 낭독하는 영상을 보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1993년 12월 안성기가 다섯 살배기 아들에게 쓴 편지였다. 다빈씨는 "아버지의 서재에 버리지 않고 모아두신 것이 있었다. 유치원 과제로 그림을 그리면 편지를 써주셨다. 우리 모두에게 남기고 가신 메시지인 것 같아 읽어보겠다"며 편지를 꺼내 들었다.
"아빠는 아들이 겸손하고 정직하며 남을 사랑할 줄 아는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실패나 슬픔을 마음의 평화로 다스릴 줄 아는 그런 사람이 되어라. 어떠한 어려움 앞에서도 자신을 잃지 말고 끝없이 도전해 보아라…. 이 세상에서 참으로 바꿀 수 없이 필요한 것이란 바로 착한 사람이란 것을 잊지 말아라." 마지막 문장의 '착한 사람'이 가슴에 박혔다. 60여년간 한결같은 품격으로 한국 영화를 지켰던 대배우가 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유산은 '착한 사람'이었다.
안성기의 편지는 부모라면 자식에게 할 수 있는 당부들이다. 그러나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누구나 쉽게 말은 할 수 있지만 실천하며 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직하면서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야망을 품되 타인을 밀어내지 않기가 어쩌면 자신의 손해까지 감내해야 하는 힘든 일이다. 이른바 '부모 찬스'로 부를 대물림하는 요즘 세태에서 부모가 자식에게 남을 배려하며 살라고 하는 건 공자님의 말씀으로 치부할 수도 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착한 사람'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 것 같다. '착한 사람'이라는 말에는 고유의 긍정적 의미보다 '무능력한 사람'이라는 시선이 있다. 그러나 안성기의 편지는 꺼져가던 '착한 사람'의 언어를 되살리고 있다. 안성기의 편지는 묻고 있다. 지금 한국 사회의 부모가 자녀에게 물려줄 진정한 유산이 무엇인가.
최근 한국 사회 정치 지도자들의 도 넘은 '자식 사랑'과 비교된다. 김병기 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와 이혜훈 기획예산처 장관 후보자가 대표적이다. 두 정치인을 둘러싼 논란이 뼈아픈 이유는 자녀의 '부모 찬스' 의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김 전 원내대표는 오래전 장남의 국가정보원 취업에 이어 차남의 가상자산거래소 업체 취업 청탁과 관련한 의혹을 받고 있다. 이 후보자는 청년인턴 비서관 폭언, 부동산 투기, 자녀 취업 특혜 의혹까지 공정을 중시하는 청년들을 자극하고 있다. 보통의 청년들은 '아빠 김병기' '엄마 이혜훈'의 부모 찬스에 또 한 번 절망하고 있다.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 사건 이후 우리 사회에서 부모 찬스는 사회의 공정성을 뒤흔드는 문제로 여겨진다. 노력보다는 부모의 배경이 앞서는 사회적 신뢰 붕괴의 단면이다. 공정에 민감한 청년층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은 정부와 체제에 대한 불신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정부가 청년기본법 등 청년세대를 위한 여러 정책을 쏟아내고 있지만, 공정이 무너지면 백약이 무효다.
연기를 잘하는 배우는 많지만, 삶의 태도로 대중의 신뢰를 받는 배우는 드물다. 안성기가 남긴 주옥같은 영화와 연기보다 오래 우리 곁에 남을 유산은 그토록 '착한 사람'이 되고자 했던 그의 삶의 태도일 것이다. 자녀에게 물려줄 유산은 '부모 찬스'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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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철 콘텐츠 편집1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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