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나비' 팜므파탈부터 '길소뜸' 이산가족까지
1957년부터 700편 출연해 여성 서사 확장
지난 7일 별세한 김지미(본명 김명자)는 한국 영화가 여성을 바라보는 방식 자체를 바꾼 배우다.
1957년 김기영 감독의 '황혼열차'로 데뷔한 그는 1년 뒤 '별아 내 가슴에(1958)'로 폭발적 인기를 얻어 1960년대 한국 영화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얼굴이 됐다. 당대 관객이 김지미를 받아들인 방식은 이전 세대 여배우들과 달랐다. 눈물과 희생에 머무는 비극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도시화와 근대화 속에서 욕망과 불안을 동시에 품은 여성상을 스크린에 올렸다. 세련된 외양, 빠른 말투, 흔들리는 시선은 전후 한국 사회가 처음 마주한 '현대적 여성'의 표정과 겹쳤다.
이미지가 가장 급진적으로 확장된 작품은 조해원 감독의 '불나비(1965)'다. 살인 사건 중심에 선 여인을 연기한 이 작품에서 그는 한국 영화사에서 보기 드문 팜므파탈의 얼굴을 완성했다. 관능을 과시하기보다 정지된 표정과 미세한 시선의 흔들림으로 긴장을 만들었다. 당시 평단은 "에로티시즘보다 불안을 먼저 불러내는 얼굴"이라 평가했다.
김지미는 1970년대 들어 연기 방향을 또 한 번 틀었다. 김수용 감독의 '토지(1974)'에서 대지주 가문을 이끄는 안주인 역을 맡았다. 더 이상 '사랑의 객체'가 아니었다. 가문과 재산, 질서를 움직이는 주체였다. 격정적 감정보다 절제된 말투와 판단이 화면을 지배했다. 그는 이 작품으로 파나마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과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동시에 받았다.
연기의 정점은 임권택 감독의 '길소뜸(1985)'이다. 이산가족 아들을 찾아 헤매는 중년 여성을 연기하며 화려한 스타의 얼굴을 완전히 내려놓았다. 김지미는 울음을 터뜨리지도, 감정을 과장하지도 않았다. 굳은 표정, 낮은 목소리, 오래 멈춘 시선으로 '기다림'이라는 시간을 그대로 관객에게 전달했다. 후시 녹음이 아닌 자신의 목소리로 완성한 이 연기는 한국 멜로드라마가 과잉 감정에서 내면 심리로 이동했음을 보여줬다.
순정 멜로의 주인공에서 위험한 팜므파탈로, 가족과 질서를 짊어진 여성으로, 상실을 견디는 중년 여성으로 이동하면서 한국 영화 속 여성 인물들의 스펙트럼은 확장했다. 눈물과 희생에 고정돼 있던 여성 서사 역시 그의 얼굴을 거치며 욕망과 권력, 상실과 책임을 함께 품는 복합적 존재로 진화했다.
700여 편에 달하는 필모그래피는 단순한 다작의 기록이 아니다. 김지미는 시대가 요구하는 여성상의 변화를 가장 민감하게 흡수해 연기로 번역했다. 1960년대 관객은 그의 세련된 멜로에 열광했고, 1970년대 관객은 권위와 욕망에 숨을 죽였으며, 1980년대 관객은 '길소뜸' 속 침묵의 시간을 함께 견뎠다.
지금 뜨는 뉴스
김지미는 2019년 부산국제영화제 오픈 토크에서 "배우로서도 인생으로서도 종착역에 가까워진다"며 "관객들 가슴 속에 오래 남고 싶다"고 말했다. 바람대로 그가 보여준 얼굴과 연기는 이미 여러 세대 관객의 기억 속에 깊게 각인돼 있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한국영화 여성상을 바꾼 김지미의 시간[라임라이트]](https://cphoto.asiae.co.kr/listimglink/1/2017071117514718932_4.jpg)
![한국영화 여성상을 바꾼 김지미의 시간[라임라이트]](https://cphoto.asiae.co.kr/listimglink/1/2025121023493951276_1765378179.jpg)
![한국영화 여성상을 바꾼 김지미의 시간[라임라이트]](https://cphoto.asiae.co.kr/listimglink/1/2025121023505551277_1765378255.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