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건수 한국벤처캐피탈협회장 걷기 인터뷰
K뷰티 성공비결은 네거티브 규제전환
스타트업 성장에 달린 한국 미래…제도 개선 지원이 최고
"날씨가 추울 때는 이렇게 몰(Mall)을 걷는 것도 좋습니다. 트렌드도 느끼면서 날씨에 상관없이 걸을 수 있어요."
동지를 지나 본격적인 추위가 시작된 지난 23일 서울 여의도 한 대형 쇼핑센터에서 윤건수 한국벤처캐피탈협회 회장(DSC인베스트먼트 대표)을 만났다. 평소 필라테스와 걷기운동으로 체력을 관리하는 윤 회장은 겨울철에는 실내걷기를 즐긴다. 연말 분위기가 가득한 몰을 걸으며 윤 회장과 대한민국 경제의 활력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1962년생인 윤 회장은 경북대학교 전자공학과에서 학위를 취득하고,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MIT) 슬론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MBA)를 마쳤다. LG종합기술원과 LG텔레콤에서 재직하며 기술기획과 서비스 개발을 담당했고, 이후 한국기술투자 상무, LB인베스트먼트 상무 등을 역임하며 벤처투자 분야에서 경력을 쌓았다. 2012년에는 DSC인베스트먼트를 설립해 대표이사로 재직 중이며, 이 회사를 국내 대표 벤처캐피털 중 하나로 성장시켰다. 2023년 2월부터 제15대 한국벤처캐피탈협회 회장을 맡아 벤처투자 환경 개선에 힘써왔다.
"지금 글로벌 시가총액 순위를 한 번 보세요."
윤 회장은 스마트폰을 꺼내 글로벌 시가총액 10위 내 기업들의 목록을 보여주며 "대다수 기업이 창업주가 경영하는 빅테크 기업"이라며 "우리는 100위권 내 삼성전자만 겨우 명함을 내민다"고 말했다. 그는" 삼성이 순위권에 속하지만, 이제는 창업 3세까지 온 기업"이라며 "우리 경제에는 지금 창업 활력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대기업들이 현재까지 한국의 산업계를 이끌어 왔지만, 한국의 미래는 스타트업의 성장에 달렸다. K-스타트업의 가능성을 어떻게 보시나
K-스타트업의 빠른 실행력이 장점이었다. 우리나라가 미국하고 중국하고 비교해서 자본이 많은 것도 아니고 기술력도 좋은 것도 아니고 능력이 월등한 것도 아니지만, 속도가 빨랐다. 그것이 최고의 경쟁력이었다. 지금 우리나라 시스템을 보면 규제가 많고 속도가 느려졌다. 결국은 규제가 문제다. 지금 글로벌 시장을 K뷰티가 장악했다. 우리나라 중소벤처기업 분야에서 화장품은 거의 반도체와 같은 업종이다. 그 정도로 잘되고 있다. 갑자기 왜 화장품이 왜 잘 됐을까를 보면 규제의 차이다. 2012년 화장품 규제 정책을 포지티브(positive)에서 네거티브(negative)로 변경해 배합 금지 원료만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화장품 원료로 사용할 수 있게 됐다. 다양한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다 나왔다. 그리고 또 하나는 화장품 마케팅·생산·판매를 분리했다. 생산시설이 없어도 아이디어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최고의 성공작품이다. 정책을 보면 돈을 주는 정책이 제일 뒤떨어진 정책이다. 제도를 바꿔주면 된다. 민간이 돈도 더 많고, 아이디어도 더 많다. 네거티브 규제의 부작용을 걱정하는 의견들도 있지만, 문제가 생기면 그때 해결하면 된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낙관론자들이다. 시장이 어려운 이럴 때는 정부는 돈을 써서 지원하려고 하기보다 제도 개선을 통한 지원을 해주는 것이 좋다. 지금이 기회다.
-최근 밸류업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국 증시 상황이 좋지 않다
코스닥 시장이 안 좋으면 벤처 시장에 아무리 돈을 넣어도 효과가 없다. 시장이 목줄을 딱 쥐고 있다. 열어주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산업은행, 기업은행이나 정부 정책 자금 등으로 비상장주식을 투자하는 펀드를 만들듯이 코스닥 전용투자 펀드를 만드는 것이다. 3000억~5000억원 규모의 코스닥 전용 투자펀드를 만들면 어떨까. 정책자금으로는 엄청나게 큰 금액은 아니지만, 시장에 주는 메시지는 크다. 코스닥 시장은 지금 아무도 사줄 수 없는 시장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분위기를 반전할 수 있다. 결국 시장은 분위기다. 지금 코스닥 시장이 너무 저평가돼 있다. 현재 코스닥 시장의 60% 정도가 시가총액 1000억원 미만의 기업들이다. 규모가 너무 작다. 미국은 시리즈A(첫 번째 대규모 자금조달 단계)에서 1000억원씩 자금 조달을 하는데 우리는 규모가 너무 작다.
규모를 키우기 위해선 코스닥 시장 분리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얼마 전 코스닥 상장 2위 기업인 에코프로비엠이 코스피로 간다고 공시했다. 슬픈 일이다. 큰 기업은 코스피로 나가버린다. 다른 기업들도 코스피 이전을 내부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그럼 코스닥은 정말 시총이 낮은 기업들만 남는다. 우리는 시장이 하나뿐이라 경쟁이 없다. 분리해서 경쟁시키면 코스닥이 살아날 수 있다. 시장을 독립된 두 개의 회사로 만드는 것이다. 거래소에서 코스닥을 분리·독립해야 한다. 그래야 좋은 기업을 유치하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할 것이다. 우리 시장에 와달라고 노력하고, 또 코스닥 시장에서 나가려 하면 적극적으로 붙잡을 것이다. 코스닥이 살아야 벤처가 살고 벤처가 살아야 대한민국의 미래가 산다.
-최근에는 정치 이슈가 경제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투자 난도가 높아졌다
정치적인 이슈도 있지만, 지금은 글로벌 경쟁이 투자 난도를 높인다. 우리 할아버지 세대는 경북 칠곡, 시골에서 농사짓고 살아도 밥 먹고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었다. 서울을 한 번도 안 와 보셨는데, 그래도 잘 사셨다. 우리 아버지 세대는 지방 도시, 대구에서 사셨고 그때까지도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저는 서울에서 먹고 사는 데 문제가 없지만, 우리 자식 세대는 서울에만 머물면 글로벌 경쟁의 시각에서 보면 칠곡이나 대구에서 사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될 것이다. 전 세계 기업들과 경쟁해야 하기 때문이다. 글로벌 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술이다. 그 기술 개발이라는 게 말이 쉽지, 굉장히 어렵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돈도 많이 든다. 이런 것들이 다 리스크이고 그래서 투자의 난도가 높아졌다. 정치 환경도 우리가 빨리 움직이는 데 지장을 주고 있다. 미국은 100m짜리 공이 시속 50㎞로 달리면서 몸집을 불리는데 우리는 2㎝ 공이 시속 5㎞로 달린다. 5년 후 10년 후 격차는 더 벌어진다.
-한국이 직면한 저성장 환경에 대해 '서서히 가열되는 냄비 속의 개구리'에 비교한 바 있다
-우리나라 시장은 인구가 줄어들고 경제 성장도 정체했다. 이제 우리가 나갈 수 있는 방법은 효율화, 그리고 글로벌이다. 예전에는 10년~20년 후를 걱정했다면 지금은 당장 5년 후를 걱정해야 한다. 우리나라가 지금 전체적으로 속도가 너무 느려지고, 일도 너무 안 하고 있다. 미국은 미친 듯이 일한다. 고속 성장하는 과정에서 낙오하는 부분이 생기면 정부가 보호해주고, 빨리 달릴 수 있는 사람들은 더 달리게 해주는 것도 정부의 역할이다. 속도를 맞춰가는 데만 관심을 두면, 시간이 지나면 다 같이 망한다. 경쟁은 더욱 치열하게 해야 하고, 보호도 더 강하게 해줘야 한다. 시스템을 이원화해야 한다.
-퇴직연금과 벤처투자를 연계하는 부분에 대해서 최근 많은 노력을 기울이신다
-현 제도 아래 퇴직연금의 벤처펀드 출자는 불가능한 상황이다. 비상장주식은 투자 대상에서 제외되는 항목으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미국이나 영국은 퇴직연금 벤처투자를 실시하고 있다. 벤처투자는 장기투자라 퇴직연금의 성격과 딱 맞다. 막혀있으니 안타깝다. 현재 퇴직연금 수익률이 낮다. 최근 10년간 수익률이 2%대다. 정부가 대안을 제시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원금 보장이 된다고 은행에만 넣어놓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선택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개별 기업에 투자하면 리스크가 있지만, 벤처펀드에 투자하면 리스크가 낮아진다. 예를 들면 벤처펀드를 통해 3년 동안 1년에 10개씩, 30개의 회사에 투자할 수 있다. 그러면 시간·운용사·업종에 대한 리스크가 분산되면서 수익률은 높게 가져갈 수 있다. 최근 10년간 연기금·공제회가 출자한 벤처조합 청산 수익은 연평균 10%를 웃돈다. 국민연금 13.9%, 사학연금 10.1%, 과학기술공제회 11.9% 등이다.
-퇴직연금 벤처투자에 대해 아직은 여론이나 제도적인 난관이 있는데
시행령 개정이 필요하다. 퇴직연금은 국민들의 노후생활에 너무 중요하다. 국민연금만 받아서는 노후 보장이 안 된다. 퇴직연금이 중요한데 정부가 그것을 미리 막아놓지 말고, 고수익 상품 쪽으로도 국민들이 선택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지금 여론이나 정부의 움직임은 나쁘지 않다고 본다. 다만 현재 정부 시스템이 멈춘 상황이 돼서 좀 안타깝다.
-협회장으로 2년의 임기를 거의 다 채우셨다. 지난 2년을 돌아본다면
그동안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을 경험했다. 조용하게 살던 사람이 밖에 나가 이야기할 시간이 많았다. 벤처투자라는 것이 제가 2년 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국가적으로 훨씬 더 중요하고 파급 효과가 매우 크다는 점을 느낀 시간이었다. 과거보다 더 사명감을 가지게 됐다. 적극적으로 투자하는 환경이 마련돼야 우리나라에 신산업이 등장할 수 있다. 심사역들에게 생계 수단으로 일하지 말고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라고 한다. 왜냐하면 스타트업이 일어나야 국민들이 먹고산다. 신산업 생태계를 만드는 일이고, 우리의 미래가 달라지는 일이다. 창업자는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이다. 정말 어려운 일이지만 간혹 보면 참신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창업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구석구석에 많다. 그런 것들이 좀 더 발전해서 주변부가 아닌 중심 산업을 흔들 수 있는 아이디어가 한국에서 많이 나와야 한다.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선 연결과 협력이 중요하다. 한국에 있는 나랑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연결하고 협력해서 글로벌 1등과 싸워야 한다. 희망은 있다.
대담=이선애 증권자본시장부 부장
정리=박소연 증권자본시장부 차장
박소연 기자 mus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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