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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달랐다'…민주주의의 승리로 기록될 '계엄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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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반동에서 후퇴하지 않은 민주주의
군부대 의회 진입 유혈 사태로 이어지지 않아
성숙한 민주주의와 시민의 힘 덕분에 가능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6시간 만에 해제됐다. 의회에 군인들이 난입하며 헌정이 중단될 국가적 위기가 벌어졌지만, 아무도 죽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기적 같은 일들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계엄령이 선포됐던 3일 밤 주요 무대는 국회였다. 계엄군이 헌법상 계엄을 해제할 유일할 권리를 갖는 국회를 제압하기 위해 진입을 시도했다. 병력은 280명 정도였다고 하지만, 우리 군이 보유한 최정예 부대였다. 아울러 수도 서울에 경찰력이 집중적으로 동원되어 국회가 봉쇄됐지만, 국회의원들은 의사당 본관에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우린 달랐다'…민주주의의 승리로 기록될 '계엄의 밤' 4일 국회의사당 본관에 계엄군 20여명이 국회 본관에 유리창을 부수고 진입을 시도 하고 있다. 김현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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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과거 비상계엄의 아픈 역사가 있다. 군이 전면에 나서 헌정질서를 중단시켰을 때에는 어김없이 누군가가 피를 흘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군과 시민, 그리고 정치인이 충돌했지만, 참사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번에 달랐던 것은 우리 사회가 발전하면서 한층 깊어지고 성숙해진 민주주의의 영향이 컸다.


계엄군으로 국회에 진입한 군은 시민 또는 정치인들과의 충돌에 놀라울 정도로 소극적이었다. 최정예 참수부대라 불리는 이들은 완전 무장을 했음에도, 몸싸움 과정에서 극도의 자제력을 보였다. 설사 유혈사태를 피하라는 지침 등이 있더라도 이를 이행할 수 있는 것은, 부대원들의 의식적 노력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우린 달랐다'…민주주의의 승리로 기록될 '계엄의 밤'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가운데 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시민들이 모여 비상계엄 해제를 촉구하고 있다. 강진형 기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대통령 권한을 넘어서 입법권과 사법권을 장악한 절대군주가 되려는 이 비상계엄을 선포하려는 시도에도 불응한 장병들이 많다"며 "명령에 응한 지휘관이나 병사조차 국민을 살상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파괴를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개머리판으로 사람 폭행하고 총 쏘지 않는 대신 최소한으로 직무를 수행해 시민 피해를 최소화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치열하게 목숨 걸고 싸운 당직자와 보좌관, 야밤에 잠자리에서 깨어나 국회로 달려온 시민들의 힘으로 쿠데타가 좌절됐다"며 "대통령의 군사쿠데타 명령에 압도적 다수의 군 장병이 응했다면, 또 쿠데타 현장에 동원됐던 지휘관과 병사들이 조금만 더 빨리 국회를 장악하고 국회 요인들을 체포했다면, 또 이들이 더 신속하게 의결 절차 전에 국회를 장악했고 체포에 나섰다면, 국회의원들이 안위를 걱정해 몸 숨기기에 급급했다면, 국회가 막혔다고 경찰이 막는다고 국회 진입을 포기했다면, 이런 우연적 요소를 하나라도 뺐다면 역사적 반동을 막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경찰 역시도 달랐다. 계엄 상황에서 경찰은 국회의원들의 출입을 완전히 봉쇄했다, 일부 허용했다 하는 등 오락가락한 행보를 보였다. 여기에는 경찰 나름의 사정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5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현안보고 당시 조지호 경찰청장은 신정훈 국회 행안위원장(민주당)의 질의와 답변 과정에서 계엄사령관으로부터 국회를 통제하라는 지시를 받고 "법률적 근거가 없다"는 답을 했다. 이에 포고령 발표를 근거로 재차 지시하자, "포고령을 보고 적절한 조치를 하겠다"고 답했다. 계엄사의 서슬 퍼런 명령 앞에서도 법적 근거를 내놓으라는 합리성은 그나마 남아 있었다.


무엇보다 역사의 방향을 바꿨던 것은 시민의 힘이었다.


'우린 달랐다'…민주주의의 승리로 기록될 '계엄의 밤' 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시민들이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해제 소식을 접한 뒤 환호하고 있다. 강진형 기자

시민들은 그날 밤 불면의 밤을 보내며 역사의 반동을 막아냈다. 약 4000명의 시민이 국회 인근에 모여 국회 진입을 시도한 군부대를 막아섰다. 시민들이 군인들의 진입을 막아서지 않았다면 그날 밤의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박주민 민주당 의원은 "비상계엄 당시 많은 시민이 국회로 와주셨고, 굉장히 위험한 상황임에도 몸으로 경찰과 군 병력을 막아주셨다"며 "그래서 저희들이 계엄 해제 요구 의결을 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군과 경찰, 시민의 놀라운 모습 외에도 시민들 각자가 보유한 휴대폰 등이 상황을 바꿨다. 계엄이 선포된 뒤 국회에서 해제가 의결되기까지155분 동안 시민들은 SNS 등을 통해 하나로 연결됐다. 과거 계엄 상황에서 방송국과 언론에 계엄군이 진주해 언론이 통제되는 상황과 달리 이 시기에는 광범위한 시민들이 SNS를 통해 사태를 파악하고 공유하고 여론을 만들어갔다.



이렇게 모인 시민들의 목소리는 역사의 후퇴를 막아서는 힘이 됐다.




나주석 기자 gongga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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