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의 오역도 허용할 수 없는 중요 문서들
뉘앙스 차이는 물론 전문 용어도 해석해야
AI 의존하다 사람 죽을 뻔…번역가 역할 커
인공지능(AI)이 가장 먼저 대체할 직업 1순위로 항상 꼽히는 일자리는 통·번역가다. 실제로 번역은 AI가 가장 먼저 접수한 영역이었다. 구글은 이미 2016년부터 AI 기반 번역 서비스를 적용했고, 이젠 스마트폰에도 자동 번역 AI 비서가 기본으로 탑재된다. 생소한 언어로 된 웹사이트도 클릭 한 번만 하면 한국어로 읽어볼 수 있는 시대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완전한 AI 대체 가능성'에 대해선 고개를 내젓는다. 어쩌면 중요하지 않은 웹사이트나 스쳐 지나가는 영상 자막 정도는 AI의 힘을 빌릴 수 있다.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정보가 담긴 공문서, 기업 간 미팅 자료 등은 기계의 판단에만 맡기기엔 너무나 위험하다는 것이다.
대명사 '나'와 '우리' 딱 한 번 틀렸는데…사람이 죽을 뻔했다
2020년 미국 이민당국이 발칵 뒤집힌 사건이 있었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에서 탈출한 난민 A씨가 미국 법원에 망명 신청서를 냈는데, 법원은 이를 거부했다. 그 이유는 A씨가 제출한 서면 신청서 내용과 이민당국 인터뷰 당시의 내용이 서로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문 번역가인 우마 미르카일은 인터뷰 내용과 A씨가 제출한 서신을 샅샅이 분석한 끝에, 법원이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문제는 법원에 제출된 증거 서류에 있었다. A씨가 "나"라고 말한 부분을 AI 번역 도구가 "우리"라고 번역하는 바람에 모든 사실관계가 엉망이 되어버린 해프닝이었다.
A씨는 아프가니스탄의 지역어 중 하나인 '파슈토어'를 구사했다. 소수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번역가는 찾기도 힘들뿐더러, 양성 비용도 막대하다. 이 때문에 많은 유관 부처는 AI를 포함한 여러 번역 도구로 난민 심사 과정을 자동화했다. 그러나 AI 번역기만으로는 다른 나라 말을 우리 말로 변환할 때 완전히 적합한 대체어를 찾을 수 없다는 게 문제다.
약간의 뉘앙스 차이도 허용할 수 없는 작업, AI는 할 수 없어
이런 번역, 통역 실수는 사실 일상적으로 벌어진다. 인기 영화의 자막도 해마다 숱한 '오역 논란'이 불거지며, 소설을 읽을 때나 외국인과 대화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사람의 생명이 오가는 난민 망명 심사에선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실수다.
AI의 진보에도 불구하고 통·번역가가 완전히 대체될 수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통·번역가는 단순히 다른 나라 말을 우리 말로 바꿔주는 사람이 아니다.
번역의 영역은 일상적인 내용에 국한되지 않는다. 법률, 공학, 금융, 의료 등 온갖 전문 용어로 점철된 문서를 일일이 해석하며 완성해야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일례로 새로운 약품의 조제, 취급과 관련된 매뉴얼을 번역한다면 아주 약간의 오류만으로도 수많은 환자를 위험에 몰아넣을 수도 있다. 아주 약간의 뉘앙스 차이조차 허용할 수 없는 말씨의 변환 작업, AI 시대에 통·번역가의 존재 이유는 거기에 있는 셈이다.
임주형 기자 skepped@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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