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필휘지의 몽환적 비경
박대성 화백 '소산비경' 가나아트센터
드론과 항공촬영이 흔한 시대. 하늘에서 내려다본 풍경이 크게 신기할 것도 없을 것 같건만, 깎아지른 절벽의 높이가 아찔하게 느껴지는 그림의 구도에 시선이 사로잡힌다. "내가 새가 되어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 동양화의 평면적인 시점에서 탈피해 내 나름대로 현대화해서 그린 그림" 소산 박대성 화백(79)은 전시장 초입의 작품 '현율'(2024)를 두고 이렇게 설명한다.
한국화를 세계적으로 이끈 인물로 통하는 그는 2022년 독일, 카자흐스탄, 이탈리아를 시작으로 2023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LACMA), 하버드대학교 한국학센터, 다트머스대학교 후드미술관 등 해외 8개 기관에서 진행한 순회전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LACMA에서 열린 전시는 관람객이 줄을 설 정도로 인기가 뜨거워 두 달 연장됐다. 이 같은 해외 순회 전시 성과를 담은 기념전 ‘소산비경’이 서울 종로구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해외에 선보인 작품과 더불어 신작 10점 등 20여점을 만날 수 있다.
전통 수묵화에 현대 미술 기법을 얹어 자신만의 독창적 화풍을 완성한 박 화백은 금강산, 경주, 한라산, 인왕산 등 한반도 전역의 익숙한 풍경을 그리되 자신만의 시각으로 재구성해 화폭에 새로운 장면을 재구성해낸다. 일례로 '현율'과 같은 금강산을 그린 작품이지만 '금강설경'(2019)는 다른 필치가 느껴져 언뜻 보면 다른 작가의 작품인가 싶을 정도로 차이가 느껴진다. 작가는 "글씨 쓰는 서법을 이용해 힘있게 작업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그 서법은 눈 내린 금강산 바위와 나무의 질감을 생생하게 구현했다.
경주의 유적들을 담은 '신라몽유도'(2022)에는 각 유적의 비례가 파괴된 채 일부 유적이 크게 강조돼 있다. 특히, 작품 전체를 둘러싼 경주 남산의 모습이 기하학적 추상처럼 단순, 왜곡된 채 그려져 있다.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보름달이 환하게 뜬 밤 풍경을 그린 2017년 작 '삼릉비경'이다. 경주의 자택 정원 풍경을 그린 가로 8.3m, 세로 4.8 m 크기의 그림 속 달빛은 마치 전시장을 비추는 듯 환한 빛을 내뿜고 있다. 가나아트센터 전시장 천고가 결코 낮지 않음에도 작품 크기가 천장보다 커서 작품 일부분은 바닥을 늘어트려 놓았다.
작가는 풍경을 그릴 때도 대상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의도적으로 생략하고 강조하는 효과를 통해 산수화에 대한 선입견을 깨트리고 추상화와 같은 낯선 경험을 선사한다.
"동양화는 정신성이 첫째고 그다음에 조형으로 들어가지만, 서양화는 닮았나, 안 닮았나를 먼저 보는 것 같다. 저 사람들(미국과 유럽 관람객)은 내 작업을 보면 놀라서 넘어진다. (먹으로) 검은 걸 해놨는데 뭔가 느낌이 오니까. 또 눈 쌓인 것을 표현할 땐 아무것도 그리지 않고 여백으로 표현하니까."
지난 2022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어느 수집가의 초대-고 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기념전'에 작가의 작품 '불국설경'이 전시됐다. 생존 작가의 작품이 전시된 건 박 화백이 유일했다. 해외 순회전에서는 'Do you know RM?' 이란 질문이 쏟아졌다고 한다. RM이 박 화백의 작품을 좋아해 SNS에 경주 솔거미술관을 찾아 그의 작품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올렸던 것을 기억한 팬들의 물음이었다.
재벌 총수가 존경하고, 최고의 스타가 주목하는 작가지만 그는 자신의 작품을 소유한 적이 없다. 일생을 담아 그린 대작도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박 화백은 2008년 자신의 작품 970점을 경주에 기증하며 '경주솔거미술관'의 기틀을 마련했다. 앞으로도 꾸준히 작업하고 기증해 미술관을 추가로 개관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오랫동안 수행을 하다 보니 태어나 가져온 것도, 또 죽을 때 가져갈 것도 없는데 내 것이 어디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을 위해 베풀 줄 알아야 하고 예술이야말로 공공성이 있어야 한다. 네 것 내 것 없이 살아야 삶이 풍요로워질 수 있다."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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