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피싱범이 물건 판매자와 구매자 양측에 접근해 이른바 '삼자 사기'를 벌였을 때 그 같은 사기 범행을 예견하기 어려웠던 피해자에게 공동불법행위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26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1부(주심 오경미 대법관)는 건설기계 매매업자 배모씨가 굴삭기 판매자 강모씨를 상대로 낸 부당이득금 반환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강씨가 배씨에게 2400만원을 반환하라'고 원고 일부 승소 판결한 2심 판결 중 예비적 청구(불법행위에 따른 손해배상)에 관한 피고 패소 부분을 파기하고 해당 부분 사건을 대전지방법원으로 돌려보냈다.
앞서 2심 법원은 피고 강씨에게 400만원의 부당이득반환책임과 2000만원의 불법행위에 따른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했는데, 대법원은 2심이 인정한 강씨의 공동불법행위 책임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피고에게 성명불상 사기범의 불법행위에 대한 예견가능성이 있었다거나 피고의 행위와 불법행위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된다고 보기 어렵다"라며 "그런데도 원심이 피고의 과실 방조에 의한 불법행위책임을 인정한 데에는 논리와 경험의 법칙을 위반해 자유심증주의의 한계를 벗어나거나 과실 방조의 불법행위에 관한 법리를 오해한 잘못이 있다"고 파기환송의 이유를 밝혔다.
강씨는 2021년 11월 22일 인터넷 중기거래 사이트에 자신의 굴삭기를 판매희망가 6500만원에 매물로 등록했다. 이를 본 보이스피싱범 A씨는 강씨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이 굴삭기를 구매할 테니 일단 판매글을 내려달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강씨에게 요청해 굴삭기의 최신 사진과 건설기계 등록증, 강씨의 인감증명서, 건설기계양도증명서, 강씨 명의의 은행 계좌번호 등 굴삭기 매매에 필요한 서류들을 핸드폰 문자로 전송받았다.
강씨는 A씨에게 이들 자료를 보내면서 A씨의 전화번호가 카카오톡에 친구 등록이 되지 않아 의아했지만, 특별히 A씨의 신상에 관한 확인 절차를 거치진 않았다.
며칠 뒤인 2021년 11월 30일 A씨는 건설기계 매매업자 배씨에게 강씨를 사칭해 접근, 애초 사이트에 판매가 6500만원으로 올렸던 굴삭기를 5400만원에 팔고 싶다고 속였다. 시세보다 훨씬 낮은 가격을 제안받은 배씨는 당일 직원을 시켜 A씨와 구두로 굴삭기 매매약정을 맺었다.
그리고 다음날인 2021년 12월 1일 배씨는 A씨와 굴삭기 매매계약을 체결하고 A씨로부터 강씨의 계좌번호와 인감증명서, 등롱즉원본, 이전서류 등의 사진을 전달받았다. A씨가 굴삭기를 사겠다고 속여 강씨로부터 전달받은 서류들이었다.
A씨를 굴삭기 주인인 강씨라고 생각한 배씨는 A씨가 보내준 강씨의 계좌로 굴삭기 대금 5400만원을 송금했다. 배씨로부터 송금 사실을 확인한 A씨는 곧바로 강씨에게 전화를 걸어 마치 자신이 5400만원을 송금한 것처럼 행세했다.
그러면서 A씨는 강씨에게 "세금신고 문제가 있어 통장에 거래금액이 찍혀야 한다"면서 "5000만원을 내가 지정하는 계좌로 다시 보내주면, 바로 6100만원을 송금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A씨는 강씨에게 "굴삭기 매매대금이 입금되면 금액을 넣었다 뺐다 할 수 있으니 스마트뱅킹이나 인터넷 뱅킹 이체한도가 5000만원 정도는 돼야 한다"고 얘기해 수락을 받는 치밀함을 보였다.
A씨가 세금을 탈루하기 위해서 이런 요구를 한다고 지레 짐작한 강씨는 별다른 의심 없이 A씨의 요구대로 A씨가 지정한 B씨의 계좌로 5000만원을 송금했다. 자신에게 5400만원을 보낸 송금자(배씨)와 5000만원을 받을 입금자(B씨)의 명의가 달랐지만, 아직 굴삭기 소유권이전등록을 위한 서류를 교부하거나 굴삭기를 인도하지 않은 상태였고, 5400만원을 보낸 사람이 A씨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굳이 이유를 따져 묻지 않았다.
그런데 5000만원을 송금받은 A씨는 약속한 6100만원을 보내주지 않았고, 이후 연락이 두절됐다. 수사 과정에서 A씨는 B씨에게 일정한 수수료를 주고 송금받은 5000만원으로 비트코인을 구매해 자신이 지정한 가상화폐 지갑주소로 전송하게 한 것으로 조사됐다.
결국 굴삭기를 5400만원에 구매했다고 생각하는 배씨와 굴삭기 매매대금을 400만원밖에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강씨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고, 나중에야 두 사람은 A씨의 사기 범행으로 피해를 당했음을 알게 됐다.
굴삭기 매매대금으로 5400만원을 송금하고도 굴삭기 소유권을 취득할 수 없게 된 배씨는 강씨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자신이 송금한 5400만원을 송금 계좌 명의인인 강씨가 부당한 이득으로 취득했으니 돌려달라는 소송이었다.
하지만 1심 법원은 배씨의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강씨가 부당하게 취득한 이익은 A씨가 지정한 계좌로 송금한 5000만원을 제외한 나머지 400만원이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강씨 역시 A씨의 사기 범행에 속아 송금받은 5400만원 중 5000만원을 다시 송금했을 뿐, 강씨가 A씨와 범행을 공모했거나, A씨의 범행을 도왔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봤다. 또 까딱 잘못했으면 굴삭기 대금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굴삭기 소유권을 잃게 될 가능성도 있었던 만큼 강씨 역시 A씨의 불법행위(사기)로 인해 간접적인 피해를 입은 피해자로 볼 수 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적어도 A씨에게 반환된 5000만원과 관련해서는 아무런 이익을 얻은 것이 없는 피고로 하여금 원고에게 그 반환의무를 부담시키는 것은 위 사기 범행의 최종적인 피해자를 원고에서 피고로 교체하는 결과만 될 뿐으로 정의와 공평의 이념을 근거로 하는 부당이득제도의 취지에 부합한다고 볼 수 없는 점 등을 고려하면, 피고가 A씨의 기망행위로 인해 원고로부터 피고의 계좌로 송금된 돈을 A씨의 요구에 따라 그가 지정한 계좌로 다시 송금한 것을 두고 부당이득 반환의무의 요건으로서의 실질적 이득이 피고에게 귀속됐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5000만원의 최종 수익자는 보이스피싱범 A씨이지 강씨가 아니라는 결론이다.
그런데 2심 법원은 1심과 달리 '강씨가 배씨에게 2400만원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배씨는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하면서 처음 소를 낼 때의 부당이득반환 청구 이외에 예비적 청구로 'A씨의 사기 범행을 강씨가 부주의(과실)로 방조했다'며 공동불법행위에 따른 손해배상책임을 물었다.
민법상 불법행위를 방조한 사람은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고, 형법과 달리 민법에서는 과실에 의한 방조도 인정된다.
2심 법원은 앞서 1심이 인정한 400만원의 부당이득반환책임에 대한 강씨의 항소는 기각, 1심의 판결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리고 거기에 추가로 과실방조로 인한 공동불법행위자로서 강씨가 배씨에게 2000만원 및 이자를 더 배상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피고는 중고 건설기계인 굴삭기의 이 사건 거래 방법이 이례적이고 비정상적일 뿐만 아니라, 인적 사항을 전혀 모르는 성명불상 사기범이 탈법 내지 불법적인 의도를 갖고 있음을 인식하면서도, 5400만원 입금 명의인과 5000만원 수취인이 다른 이유 등을 알아보려는 시도나 매매 현장에서 곧 이뤄질 확인절차 등을 거치고 5000만원 송금을 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 사건 매매가 피싱 범죄에 이용되는 것이라는 예견가능성이 피고에게 있었다고 봄이 상당한데도, 오히려 피고는 '(피싱 범죄가 아니라) 세금탈루 정도의 불법행위에 그치는 것'이라 스스로 적극적으로 착각해 가면서 5000만원을 성명불상자가 지정한 계좌에 송금할 것을 수락하고 실제 실행해 원고의 편취금이 성명불상 사기범에게 귀속되도록 협조한 과실이 있고, 피고의 이러한 과실 방조 행위와 원고의 손해 사이의 상당인과관계도 인정된다"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이 같은 판단의 근거로 ▲강씨가 A씨의 전화번호가 카카오톡 친구 등록이 되지 않는 것을 의아해 하면서도 A씨의 인적 사항을 알아보려 하지 않은 것 ▲강씨가 5400만원을 송금한 뒤 다시 5000원을 송금받으려 한 이유가 세금을 탈루하기 위해서라고 지레 짐작하고 적극적으로 협조해 송금한 명의인과 다른 명의의 계좌로 5000만원을 송금한 점 등을 들었다.
다만 재판부는 원고 배씨에게도 과실이 있었던 점을 고려해 강씨의 손해배상책임을 2000만원으로 제한했다.
배씨가 자신의 명의로 등록하는 절차를 생략하고 곧바로 전매해 탈법적 이익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매매날짜나 매수인의 인적사항 등 내용을 전부 공란으로 기재하고 강씨의 인감도장만 날인된 건설기계양도증명서를 요구한 점과 그 같이 작성된 양도증명서 사진과 굴삭기를 운반차량에 실은 사진을 전송받자 마자 매물도 확인하기 전에 5400만원을 바로 송금한 점, 그리고 이 같은 배씨의 과실이 손해발생과 확대에 기여한 점 등이 참작됐다.
하지만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은 강씨 입장에서 굴삭기 거래 과정이 비정상이었다고 보기 어렵고, 강씨 역시 보이스피싱 범죄의 간접적인 피해자라고 봤다.
재판부는 "피고는 성명불상 사기범의 말에 속아 이 사건 굴삭기를 매도할 목적으로 이 사건 굴삭기 사진, 건설기계등록증 사진, 인감증명서 사진, 건설기계양도증명서 사진, 피고 명의 은행계좌번호 등을 휴대전화 문자로 전송해 준 피해자로 볼 수 있고, 피고가 이와 관련해 어떠한 대가를 받지도 않았다"고 전제했다.
이어 "피고가 이 사건 굴삭기를 매수할 것처럼 행세하는 성명불상 사기범의 요청에 따라 위와 같이 이 사건 굴삭기 사진 등을 전송해 준 것은 이 사건 굴삭기 매매과정에서 굴삭기의 상태나 정당한 등록 및 소유권 확인 등을 위해 필요한 자연스러운 일일 뿐 거래상 이례적이거나 비정상적인 일로 보이지 않는다"고 밝혔다.
또 재판부는 "당시 피고로서는 원고나 성명불상 사기범과 전혀 모르는 사이로서 사기범이 이 사건 굴삭기 사진 등을 피싱 범행에 이용하리라는 것을 의심할 수 있는 정황이 있었다고 볼 만한 자료도 없다"고 했다.
나아가 재판부는 "원고는 성명불상 사기범에게 기망당해 5400만원을 피고 명의 은행계좌에 송금함으로써 위 돈을 처분하는 행위를 이미 한 것이고, 피고는 그 후 매수인이자 위 돈의 송금인으로 알고 있는 성명불상 사기범의 요청에 따라 위 돈을 다른 계좌로 이체해준 것에 불과하다"라며 "당시 피고가 원고 등에 대한 관계에서 위와 같은 이체행위를 하지 말아야 할 의무를 부담하고 있었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밝혔다.
원고 배씨가 A씨에게 속아 5400만원을 강씨에게 송금한 것 자체가 사기죄의 구성요건인 처분행위에 해당돼 이미 A씨는 사기 피해를 입은 것이고, 이후 이뤄진 강씨의 5000만원 송금행위가 과실에 의한 A씨의 불법행위 방조 행위로 인정되려면 강씨에게 위반의 대상이 된 주의의무가 전제돼야 하는데, 그 같은 주의의무를 인정하기 어렵다는 취지다.
마지막으로 재판부는 "피고로서는 아직 성명불상 사기범에게 이 사건 굴삭기의 소유권이전등록에 관한 서류를 교부하거나 위 굴삭기를 인도해 주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위와 같은 이체 행위가 매도인으로서 이례적이거나 비정상적인 거래행위에 해당한다고 단정할 수 없다"라며 "당시 피고가 위 이체 행위로써 위 편취금이 성명불상 사기범에게 귀속하게 된다는 사정을 예견할 수 있었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밝혔다.
과실에 의한 방조로 공동불법행위가 성립되기 위한 요건 중 주의의무위반이나 예견가능성이 인정되지 않아 강씨에게 A씨의 공동불법행위자로서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게 대법원의 결론이다.
최석진 법조전문기자 csj040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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