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야 성향의 온라인 커뮤니티 사이트 '오늘의 유머'에 대해 "종북 세력이 활동하고 있을 가능성이 많이 있는 공간"이라고 한 발언을 해당 커뮤니티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보기 어렵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종북'이라는 표현은 시대적·정치적 상황 또는 관점에 따라 그 의미가 유동적이고 가변적이라 사실을 적시했다고 보기보다는 정치적 평가 내지 의견표명으로 볼 여지가 많다는 이유다.
31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2부(주심 천대엽 대법관)는 오늘의 유머 운영자 이모씨가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피고는 원고에게 1000만원과 이자를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승소 판결한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중앙지법으로 돌려보냈다.
재판부는 "이 사건 종북 관련 발언이 원고에 대한 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에 해당한다고 본 원심의 판단에는 명예훼손에 관한 법리를 오해해 필요한 심리를 다하지 않음으로써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고 파기환송의 이유를 밝혔다.
국정원 대변인은 2013년 1월 28일 언론 인터뷰에서 '오늘의 유머가 종북 사이트인지' 묻는 기자에게 "종북 사이트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게 아니지만 (오늘의 유머가) 종북세력이나 북한과 연계된 인물들이 활동하고 있는 가능성이 많이 있는 공간으로 본다"고 답했다.
이씨는 이 같은 발언으로 오늘의 유머가 '종북 사이트'라는 오명을 입었다고 주장하며 국가와 원세훈 전 국정원장 등을 상대로 2000만원의 위자료를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 또 이씨는 2009∼2012년 국정원이 오늘의 유머에서 이른바 '댓글 공작' 등 사이버활동을 벌여 사이트의 게시물 평판시스템이 붕괴되는 등 피해를 입었다며, 이로 인한 재산상 손해배상 2000만원과 정신적 손해배상 1000만원도 함께 청구했다.
1심 법원은 이씨의 청구를 모두 기각했다.
먼저 재판부는 "원고가 제출한 증거들만으로는, 이 사건 사이버활동으로 인해 이 사건 사이트의 게시물 시스템이 붕괴되는 등의 장애가 발생했다거나, 그로 인해 사이트 운영자인 원고에게 재산적 손해나 정신적 손해가 발생했음을 인정하기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또 재판부는 "국정원 대변인이 이 사건 사이트에 종북 세력이 활동하고 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는 취지로 말한 점은 인정되나, 그런 사실만으로 이 사건 사이트가 '종북사이트'라는 오명을 입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1심에서 전부 패소한 이씨는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의 패소판결 부분에 대해서만 항소하며 항소취지 변경을 통해 청구액을 위자료 2000만원으로 감액했다. 이씨는 국가배상법에 따라 국가가 사이버 활동 및 종북 관련 발언으로 인해 입은 재산상 손해 100원과 위자료 2000만원(사이버활동에 대한 위자료 1000만원과 종북 발언에 따른 위자료 1000만원)을 지급해줄 것을 청구했다.
2심 재판부 역시 국정원의 사이버활동이나 종북 발언으로 인한 국가의 재산상 손해배상책임은 인정하지 않았다.
반면 2심 재판부는 "국정원 대변인의 종북 관련 발언으로 인해 원고의 명성, 신용 등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침해되는 등 원고의 명예가 훼손됐고, 이는 공무원이 직무 집행 중 고의 또는 과실로 한 위법행위에 해당한다"라며 종북 관련 발언에 따른 위자료 1000만원의 배상책임을 인정했다. 국정원 대변인의 종북 관련 발언이 단순한 의견 표명이 아니라 '사실의 적시'라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은 국정원 대변인의 발언은 사실의 적시라기보다는 의견표명에 가깝다고 볼 수 있어 명예훼손이 성립하기 어렵다고 봤다.
재판부는 "이 사건 발언은 대변인이 업무상 기자의 질문에 답변하는 과정에서 하게 됐고, 내용 역시 유보적·잠정적인 판단 내지 의견이라는 점이 비교적 명확히 드러난다"고 밝혔다.
이어 "이러한 이 사건 종북 관련 발언의 경위 및 내용에다가 '종북'이라는 표현이 매우 다양하게 사용돼 시대적·정치적 상황 혹은 관점에 따라 의미와 이에 포함되는 범위가 유동적이고, 평균적인 일반인의 이해와 표현의 상대방이 된 사람의 인식 내용 역시 가변적이어서 그 의미를 객관적으로 확정하기 어려운 사정까지 더해 보면, 이 사건 종북 관련 발언은 사실을 적시한 것이라기보다는 이 사건 사이트에 대한 광의의 정치적 평가 내지 의견표명으로 볼 여지가 많다"고 밝혔다.
또 재판부는 "설령, 이 사건 종북 관련 발언이 사실을 적시한 것으로 볼 여지가 있더라도, 단순히 '종북'이라는 표현이 사용됐다고 해서 특정인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단정할 수 없고, 그 표현으로 인해 객관적으로 특정인의 평판이나 명성이 손상됐다는 사실이 증명돼야만 명예훼손에 따른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할 수 있다"라며 "이 사건 종북 관련 발언은 그 표현·내용상 이 사건 사이트의 이용자 중 일부가 종북세력이나 북한과 연계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취지에 불과해 그 표현이 지칭하는 대상이 이 사건 사이트의 운영자인 원고라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한편 대법원은 2018년 '종북', '주사파' 등 표현을 사용한 언론보도가 문제됐던 사안에서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해 "'종북'이라는 표현은 과거 북한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태도를 뜻하는 것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이후 '주체사상을 신봉하고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부정하는 반국가·반사회 세력'이라는 의미부터 '북한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 '정부의 대북강경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보이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는데, 대한민국과 북한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 하에서 대한민국의 대북정책이나 북한과의 관계 변화, 북한의 대한민국에 대한 입장 또는 태도 변화, 서로 간의 긴장 정도 등 시대적·정치적 상황에 따라 그 용어 자체가 갖는 개념과 포함하는 범위도 지속적으로 변하고 있어, 평균적 일반인뿐만 아니라 그 표현의 대상이 된 사람이 '종북'이라는 용어에 대해 느끼는 감정 또는 감수성도 가변적일 수밖에 없으므로 그 의미를 객관적으로 확정하기가 어렵다"고 판시한 바 있다.
최석진 법조전문기자 csj040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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