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는 40대 박희철씨(가명)는 아내와 함께 월 1000만원가량(세금 제외)을 번다. 하지만 이 가운데 600만원을 아파트 대출 원리금 상환에 쓰고 있다. 3년 전 서울 시내 30평형대 아파트를 구입하면서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음) 대출을 한 결과다. 생활비를 제외하면 쓸 돈이 거의 없지만, 최근에는 아파트 시세가 낮아지면서 지갑 열기가 더욱 망설여진다. 세종시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는 김지현씨(가명)는 구내식당에서 대부분의 점심을 해결한다. 새해 들어 동료 직원과 함께 찾은 청사 인근 식당에서 순댓국 가격이 1만2000원으로 오른 것을 본 뒤에는 "이젠 서민 음식인 순댓국 먹기도 겁난다"며 살인적인 외식물가에 혀를 내둘렀다.
정부가 '2024 경제정책방향'을 통해 '내수 살리기'에 총력을 다하겠다고 밝혔지만, 경제 전문가들이 올해 내수 전망을 장밋빛으로만 볼 수 없다고 우려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부동산 대출 이자와 원금 상환을 하느라 소비할 여윳돈이 더욱 부족해졌고, 최근 2년 새 임금 상승률보다 물가상승률이 높아지면서 지갑을 열기 부담스러워졌기 때문이다.
11일 한국은행의 '2023년 3분기 자금순환(잠정)'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 가계 및 비영리단체의 순자금운용 규모는 26조5000억원으로 1년 전(33조8000억원)보다 7조3000억원이나 감소했다. 전 분기(28조6000억원)에 비해서도 2조1000억원 줄었다. 순자금운용이란 예금이나 주식, 채권, 보험 등 운용 자금에서 금융기관 대출금 등을 뺀 금액으로, 경제주체의 여유자금을 의미한다.
여윳돈이 줄어든 가장 큰 이유로 '부동산 매매'가 지목된다. 정부의 부동산 대출규제 완화로 주식을 팔거나 금융기관에서 대출을 받아 주택을 매매한 가구가 늘었고, 가계의 여유자금 감소로 이어진 것이다. 이 같은 사례에서 보듯 부동산 대출 및 이에 따른 이자 부담은 가계의 소비 여력을 꽁꽁 묶는 역할을 한다. 가계의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부채비율은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 188.2%에서 2020년 197.8%로 올라섰고, 2021년 209.8%로 정점을 기록했다. 2022년 203.7%로 부채비율이 다소 완화되기는 했지만, 지난해 주택담보대출(51조6000억원) 등 가계대출은 37조원 증가했다.
가계 소비의 발목을 잡는 또 다른 이유는 임금인상률보다 높은 물가상승률이다. 최근 5년간을 살펴보면 2019년부터 2021년까지의 임금인상률은 각각 4.5%, 1.2%, 3.9%로 같은 시기 물가상승률(0.2%·0.4%·3.2%)보다 높았다. 그러나 2022년부터는 상황이 바뀌었다.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이후 풀린 돈이 인플레이션을 불러일으키면서 2년 연속 6.0%, 3.9%의 고물가가 지속된 반면 임금인상률은 3.8%, 3.4%에 그쳤다. 체감 물가에 영향을 주는 생활물가지수는 소비자물가지수보다 더 올랐다. 2020년을 100으로 놓고 보면, 지난해 소비자물가지수는 111.59로 3년 새 11.5% 상승했지만 생활물가지수는 113.69로 13.6% 뛰었다.
명목임금이 늘어나는 속도가 물가 상승률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지난해 1~10월 근로자 1인당 월평균 임금총액은 전년 동기 대비 2.7% 증가했지만, 물가수준을 반영한 실질임금은 1.0% 줄었다. 올해 역시 비슷한 흐름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높다. 2024년 최저임금 인상률은 역대 두 번째로 낮은 2.5%인데, 올해 정부가 예상하는 물가 상승률은 이보다 높은 2.6%다.
내수 침체 속에서 근로소득자보다 자영업자들의 상황은 더욱 좋지 않다. 지난해 자영업자 대출은 1000조원을 넘어섰고, 자영업자의 대출 연체율도 급상승하고 있다. 한국은행이 가계부채DB를 통해 추정한 자영업자대출 연체율은 지난해 3분기 말 현재 1.24%로, 전년 말(0.69%) 대비 0.55%포인트 상승했다. 전체 자영업자 대출 중 연체 차주들이 보유한 대출 비율 역시 전년 말(1.35%) 대비 1.13%포인트 높아진 2.47%에 달한다. 대출상품 수가 3개 이상인 저소득·저신용 자영업자를 뜻하는 취약차주는 39만명에 육박한다.
세종=이지은 기자 leezn@asiae.co.kr
세종=조유진 기자 tin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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