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것이 영원히 존재한다고 보는 것은 상견(常見)입니다. 반대로 소멸하여 사라진다고 보는 것은 단견(斷見)입니다. 두 가지는 모두 양극단에 치우쳐 있습니다. 있다고 생각하면 상견에 치우친 것이고, 없다고 생각하면 단견에 치우친 것입니다. 모든 생각과 관념을 타파한다고 해서 어떤 법도 없다는 견해를 일으킨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관념이 됩니다. 실체의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그 사유의 틀 안에서 맴돌고 있습니다.
무아설의 경우 그것을 문자 그대로 '내가 없다'고 해석하는 것은 단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무아설'이라는 도그마로 작동할 위험이 있습니다. 자아가 영원히 존재한다는 상주론자의 견해가 잘못이듯이, 자아는 없다고 해석하는 단멸론자의 견해 역시 올바르지 않습니다.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는 것은 여전히 언어적 분별에 갇혀 있다는 증거입니다. 토끼에게 뿔은 본래 존재하지 않습니다. 토끼에게 뿔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질 필요는 없습니다. 무아설의 의미는 '있음'에 대한 대척점으로서 '없음'을 밝히려는 것이 아니라, '있음'과 '없음'의 분별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에 초점이 있습니다.
현실 세계에서 눈으로 보고 소리를 듣는 '나'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일상의 경험적 자아가 없다고 말하려는 것이 무아설의 의도는 아닙니다. <금강경>에서도 부처님은 '내가 보살이었을 때…' '내가 설한 것은…'과 같이 자신을 표현합니다.
이 점에서 무아설은 자아의 유무를 따지는 형이상학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의 고통을 소멸시키기 위한 실용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거짓된 자아의 관념을 걷어내는 일이 급선무입니다. 자아의 완고한 틀은 좀처럼 깨지지 않기 때문에 '없다'고 말하는 충격요법을 썼습니다만, 불교의 바른 견해는 한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中道)에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자아는 우리의 생각과 같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지만, 완전히 없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내 안에 변하지 않고 존재하는 자아를 상정하고 그것에 집착하는 우리의 생각과 관념입니다. 이름일 뿐인 자아의 개념을 실체화하고 '나'라는 고정된 관념 속에 스스로 갇히는 일을 말합니다.
-김성옥, <인문학 독자를 위한 금강경>, 불광출판사, 1만6000원
조인경 기자 ikj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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