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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산책] 70년만에 우리 땅 찾아온 '한국에서의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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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참상 담은 반전작품
전쟁폭력성 고발·평화 염원 표출

예술의전당서 110여점 전시…작품 가치 2조원 달해
만돌린을 든 남자·마리 테레즈의 초상…입체주의의 진수 확인할 수 있어

[갤러리산책] 70년만에 우리 땅 찾아온 '한국에서의 학살' 파블로 피카소, 한국에서의 학살, 1951, 합판에 유화.(사진제공=비채아트뮤지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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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최동현 기자] 합판으로 된 그림의 폭은 2m 남짓. 오른쪽 절반은 6명의 군인이 왼쪽으로 총을 겨누고 있는 모습이다. 이들은 사람이라기보다 로봇 형상에 가깝다. 투구를 쓰고 긴 칼도 들어 중세 기사처럼 보이기도 한다. 왼쪽에는 3명의 성인 여성과 소녀, 4명의 어린아이가 있다. 모두 알몸이다. 아이를 안고 있는 여성은 오열하듯 표정이 일그러졌다. 일부는 겁에 질려 사색이 된 듯 굳었다. 상황을 잘 모르는 듯 천진난만하게 흙장난 중인 아이도 있다. 배경에는 초록색 잔디 위로 불타는 나무와 폐허가 된 건물이 보인다. 뿌연 잿빛 하늘은 초록과 대비돼 한층 더 암울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림은 현대미술의 거장 파블로 피카소(1881~1973)가 그린 ‘한국에서의 학살’이다. 피카소는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직후 작품 구상에 들어가 1951년 1월18일 완성했다. 그리고 같은 해 5월 프랑스 파리 ‘살롱드메’에서 작품이 처음 공개됐다. 그로부터 70년 뒤 ‘한국에서의 학살’은 작품의 무대인 한국 땅을 처음 밟게 됐다.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피카소 탄생 140주년 특별전’을 통해서다.


이번 전시를 총괄한 서준수 박사는 "‘한국에서의 학살’이 사실 잘 그린 그림은 아니다"고 평했다. 피카소 특유의 입체주의적 양식이 극히 제한적으로만 드러나서다. 그림의 구도도 스페인 낭만주의 화가 프란시스코 데 고야(1746~1828)의 ‘1808년 5월 3일’과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에두아르 마네(1832~1883)의 ‘막시밀리앙의 처형’에서 그대로 가져왔다. ‘한국에서의 학살’은 발표 당시 피카소의 이전 반전 걸작인 ‘게르니카(1937)’나 ‘시체구덩이(1944~1946)’와 달리 미술계로부터 그리 좋은 평가를 얻지 못했다.


그럼에도 ‘한국에서의 학살’은 전쟁의 폭력성을 고발하고 평화의 염원을 표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서 박사는 "‘게르니카’나 ‘시체구덩이’의 경우 종료된 사건을 다뤘지만 ‘한국에서의 학살’은 진행 중인 사건을 그렸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며 "배경을 녹색으로 칠한 것은 궁극적으로 평화의 염원이 반영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갤러리산책] 70년만에 우리 땅 찾아온 '한국에서의 학살'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진행중인 '피카소 탄생 140주년 특별전'에 걸린 파블로 피카소의 모습.


"그림은 집 안을 장식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다. 적에 대한 공격과 방어의 전쟁도구다." 전시장 한 편에 써 있는 피카소의 어록이다. 피카소는 예술을 미적 가치로만 보지 않았다. 좀 더 적극적으로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행위로 봤다. 공산당에 가입한 것도 그 때문이리라. 그는 1944년 10월29~30일자 프랑스공산당 기관지 ‘뤼마니테’와 가진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공산당에 가입한 것은 내 삶과 내 모든 작품의 논리적 결과다. 나는 결코 회화를 단순한 놀이나 여가로 여긴 적이 없다. 나는 나의 무기였던 데생이나 물감을 통해 세상과 인간의 지식에 더 깊이 파고들길 원했다. …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내가 본 끔찍했던 억압의 세월은 내가 예술로만 싸울 게 아니라 내 스스로 싸워야 한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래서 나는 망설임 없이 공산당에 들어갔다."


전시장에는 피카소의 유화·판화·조각·도예 등 110여점의 작품이 걸려 있다. 이들 작품의 가치는 약 2조원에 이른다. 모두 파리 국립피카소미술관에서 가져왔다.


[갤러리산책] 70년만에 우리 땅 찾아온 '한국에서의 학살' 파블로 피카소, 만돌린을 든 남자, 1911, 캔버스에 유화.(사진제공=비채아트뮤지엄)


피카소의 미술사적 최고 업적으로 평가받는 ‘입체주의’의 진수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도 다수 걸려 있다. 입체주의는 피카소가 1907년 ‘아비뇽의 처녀들’을 발표한 이후 발달한 미술운동이다. 입체주의는 원근법·유화물감·명암대비가 특징인 르네상스(14~16세기)의 전통을 400년 만에 무너뜨린 ‘미술혁명’으로 평가받는다.


대표적인 작품이 ‘만돌린을 든 남자(1911)’다. 크기가 가로 62㎝, 세로 71㎝로 전시장에 있는 피카소의 주요 입체주의 작품 가운데 가장 크다. 피카소는 1911~1913년 뮤지션이 주인공인 대형 입체주의 작품 8점을 시리즈로 제작하는데 이 작품은 그중 하나다. 선과 도형 등 기하학적 형태가 무질서한 듯 얽혀 있다.



피카소의 예술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소재가 ‘여성’이다. 그는 생전에 7명의 여성과 교제했다. 결혼 두 번에 자녀를 4명 낳았다. 피카소는 이들 여성을 소재로 다양한 작품도 남겼다. 그 가운데 ‘마리 테레즈의 초상(1937)’은 전시장에 걸린 여성 시리즈 중 색감이 가장 화려하다. 이 작품의 모델은 1926년 피카소가 45세에 만난 17세 소녀 마리 테레즈 발테르다. 푸른 톤의 피부와 화려한 색감의 옷 등 전반적으로 젊고 밝은 분위기다. 얼굴은 정면과 측면을 동시에 표현했다.


[갤러리산책] 70년만에 우리 땅 찾아온 '한국에서의 학살' 파블로 피카소, 마리 테레즈의 초상, 1937, 캔버스에 유화.(사진제공=비채아트뮤지엄)



최동현 기자 nell@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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