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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 詩] 닥터, 햇빛/채수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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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부린 등 속으로 굵은 빗방울들 내리꽂히는 줄도 모르고. 등이 점점 둥글게 패는 것도 모르고. 등을 펼 줄 모르는 사람처럼. 땅만 보고, 땅만 배우고, 땅만 알았던 사람처럼. 생이란 처음부터 굽은 채 시작된 사람처럼. 비와는 무관한 사람처럼. 장맛비 속에서 노인이 몰입하고 있는 것은 단지 빈 박스.


이마에 착 달라붙은 머리카락이 검은 외계의 생물처럼. 자신의 얼굴을 반쯤 갉아먹고 있는 줄도 모른 채. 빈 박스에서 주루룩 빗물을 덜어 내듯이. 빗물에 불어 툭툭 끊기는 몸의 무게를 무덤덤하게 덜어 내듯이. 한낱 머리카락 하나 쓸어 올릴 새도 없이 장마를 따라 흐르고,


흘러 노인이 발견된 곳은 찬란한 햇빛 속. 하늘을 향해 등을 곧게 펴고. 땅을 내 팽개친 사람처럼. 처음부터 땅을 몰랐던 사람처럼. 꼼짝하지 않고 누운 채,


햇빛, 햇빛 속으로



[오후 한 詩] 닥터, 햇빛/채수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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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는 장마 속에서 폐지를 줍던 노인의 죽음에 대해 쓴 것이다. 그런데 글자들을 따라가다 보면 여느 시들에 비해 마침표가 유난히 많다는 점이 금방 눈에 띈다. 물론 문장의 끄트머리에 마침표를 적는 일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요즘 시에서 이처럼 마침표를 꼬박꼬박 쓴 경우는 참으로 드물다. 더 나아가 2연의 마지막과 3연의 마지막엔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를 쓰고 있다. 그리고 맨 마지막 시행엔 마침표도 쉼표도 없다. 시인은 왜 이토록 세심하게 문장부호를 사용한 걸까. 물론 시인의 의도야 독자인 우리가 모조리 알 도리는 없다. 그렇지만 저 문장부호들은 나침반처럼 어딘가를 향하고 있다. 그곳은 결국 "햇빛 속"인데, 안타깝게도 "햇빛 속"은 죽은 "노인이 발견된 곳"이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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