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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 詩]누란행 지하철을 타고/노향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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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동차 출입문이 닫히고 깊숙한 눈매의 이국 여자가 내 옆 좌석에 앉는다 작은 체구에 크고 둥근 청옥 귀걸이를 달았다 귀걸이는 열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달랑거린다


서역의 위구르 자치구에서 왔을까 기원전 2세기 누란 왕국이 무너진 그 자리엔 수세기의 시간들이 쌓여 있다 거기 유물관 관(棺) 안에는 미라들 다 삭은 비단옷에 덮인 채 누워 있다 부장품 청옥 귀걸이만 변색 없이 늘 푸르게 놓여 있는데 그녀가 언제 일어나 여기 온 걸까


지하철은 어느새 강 건너 더 먼 초소형 행성으로 달린다 은하철도 999처럼 추억을 헤치고 캐러밴들이 다녔던 공중 사막 길 마악 접어드는데 누군가 깜박 졸고 있는 나를 흔들어 깨운다 벌써 불빛들 뻥뻥 뚫린 어둠 속 종점이 창밖으로 펼쳐지는 여기는 누란?



[오후 한 詩]누란행 지하철을 타고/노향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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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청옥 귀걸이"를 통해 지하철에서 만난 "깊숙한 눈매의 이국 여자"와 "기원전 2세기 누란 왕국"의 '그녀'를 한 사람으로 묶는다. 더 나아가 시인은 어느 결에 문득 자신과 지하철을 탄 사람들을 '누란'으로 데려간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시인이 상상한 바다. 그런데 '상상' 혹은 '몽상'이라는 말에 더하여 나는 '인연'이라는 단어를 꼭 쓰고 싶다. 즉 시인은 상상을 통해 인연을 맺어 주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인연'은 불가적 의미에 등을 기대고 있는 말이긴 하지만, 우리가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이 세계 곳곳에 산재하는 필연적인 친밀함이라고 새겨도 될 듯하다. 그래서 시인은 모름지기 눈(詩眼)이 밝아야 한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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