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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 詩]베를린/서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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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 만나러 베를린에 간다

부품 상점의 기계 부속 이름 같은 베를린

동서를 가르듯 ㄹ과 ㄹ 사이를 분명하게 가르는 베를린

나사 같은 ㄹ을 두들겨 모음을 조립하면 베를린이 된다

더 단단해지는 ㄹ, 쇠 냄새가 난다

베를린에선 베토벤, 베버, 베르디, 베를리오즈, 베베른, 베르크, 베틀 앞의 페넬로페까지

한꺼번에 열차에 실려 온다

베를린은 비를 맞는 도시

식은 칼국수처럼 내리는 비를 맞으면

도마질 소리와

마지못해 젓가락을 들던 일요일의 점심이 떠오르고

미술관으로 프리드리히 대제의 궁전으로 오페라하우스로 숲으로 노천카페로 은행으로

톱니바퀴처럼 아귀가 물리는 베를린

비가 그친다 바짓가랑이에서 ㄹ을 털어 낸다

이를테면 ㄹ이 거꾸로 걸리거나 먼 곳으로 달아나 나사 빠진 도시가 될 수도 있으련만

기차가 중앙역을 출발한다

자음의 함량이 풍부한 베를린의 철로 위로 나뒹구는 휴지와 캔, 페트병

레일에서 들려오는

개구리 뒷다리 너구리 아가리 알이 밴 우리 종아리

종일 베 짜는 소리를 내며 베를린의 첫여름을 직조한다



[오후 한 詩]베를린/서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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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은 유음(流音)이다. 'ㄹ'은 흘러가는 소리다. 'ㄹ'은 그러나 흘러가지만 흘러가서 홀연히 사라지는 게 아니라 다시 입술 안으로 슬며시 흘러들어 오는 소리다. 'ㄹ'은 그렇게 스미는 소리다. 스미면서 적시는 소리다. 늦은 오후 오는 듯 마는 듯 내리는 비처럼. 'ㄹ'은 그러니까 "식은 칼국수처럼 내리는 비"다. 'ㄹ'은 그러다 맹숭맹숭하니 그냥 그리워지는 소리다. "개구리 뒷다리 너구리 아가리 알이 밴 우리 종아리"처럼, 그리고 하늘, 구름, 산들바람, "첫여름"처럼. 그 아래서 괜스레 흘려보내곤 했던 하루와 하루들처럼.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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