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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 詩]정원사와 유령/박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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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풍림에 밀려오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그 사람은 잘 갔어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유령이 되어 잘 갔어 바닷새가 버린 둥지 안에서 잘 썩고 있겠지 그렇게 믿어 보는 밤이면 당신은 돌아오곤 했지요 울타리 밖에 콩 껍질과 말린 열매를 뿌려 두긴 하겠지만 돌아와도 나의 정원에 들어올 수는 없어요 격자 창문 안쪽에서 나는 가만히 내다보겠지 콧김을 내뱉다가, 우두커니 내 어린 묘목의 냄새를 맡다가 당신은 이쪽을 쳐다보기도 할 테지만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이것뿐, 여기 낮의 보드라운 민달팽이를 모아 두었어요 이 아이들은 차곡차곡 당신을 먹어 치우고 모든 구멍을 막아 버릴 거예요 거름, 수분, 온기, 한자리에서 영원이 지나가도록 늙고 죽고 병들어서 당신은 홀로 땅에 녹아들 거예요 나는 스케치를 시작했어요 양치식물과 쐐기풀의 정원으로 여길 만들 거야 웅덩이를 파고 목청 높은 오리를 놓아 키우고 구석진 곳에는 큰 나뭇잎을 모아서 퇴비도 만들겠지 울타리 밖에 선 채로 돌아갈 줄을 모르는 당신과 이 밤은 어디까지 이어질까요 어쩌다가 우리는 만나고 어둠에 두 눈을 물렸을까 우린 몰랐어요 우리들의 신발이 우릴 어디로 데려가는지, 저마다의 춤을 추면서 그 춤이 서로를 위한 춤이라고 오래 착각을 했었죠.



[오후 한 詩]정원사와 유령/박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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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사는 "스케치"를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의 뜻대로 정원을 가꾸는 사람이다. 또한 정원사는 "웅덩이를 파고 목청 높은 오리를 놓아" 자신의 정원에 외부인이 함부로 침입하지 못하도록 막는 사람이다. 더 나아가 정원사는 "구석진 곳에" "큰 나뭇잎을 모아서 퇴비"를 미리 마련해 두는 사람이다. 요컨대 그는 기획하고 추진하고 경계를 짓고 미래를 대비하는 자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근대의 세계관과 관행을 나타내는 비유"로 정원사를 선택한 까닭들이다(<모두스 비벤디>). 그러니까 정원사, 그는 바로 우리다. 우리는 "저마다의 춤을 추면서 그 춤이 서로를 위한 춤이라고" "착각"하면서, 각자의 '유토피아'에 갇힌 자들이다. "유령"은 우리가 세운 "울타리 밖에" 서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어쩌면 바로 우리 자신일 것이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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