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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 詩]비/성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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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는 없고 토슈즈만 있다, 가슴은 없고 토슈즈만 뛰어다닌다, 다리도 없고 종아리도 없고 토슈즈만 음계를 밟는다, 몸통은 모두 없고 토슈즈만 바쁘다, 발목 위는 없고 다 없고 토슈즈만 뛰어다닌다, 그림자도 없이 토슈즈만 뛰어다닌다, 흙먼지 위의 흙먼지 위를 토슈즈만 뛰어다닌다, 연잎 위에 물방울이 또르르 구른다, 물방울 위의 물방울 청개구리가 한 마리 또다시 뒷발에 힘을 모은다.



[오후 한 詩]비/성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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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 시다. 이 시에 등장하는 '토슈즈'가 '빗방울'이라는 사실을 금방 눈치채지 못할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금세 책장을 넘길 수도 있겠다 싶다. 우리는 간혹 아니 실은 자주, 쉬운 시를 만나면 쉽다는 이유로 더 이상 읽기를 멈춘다. 왜 그럴까? 시를 그저 앎의 대상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컨대 시에 쓰인 비유나 수사의 정체를 어느 정도 풀고 나면 시를 다 읽었다고 착각한다. 이 시를 두고 말하자면 '토슈즈'가 '빗방울'을 대신한 말이라는 사실을 안다고 해서 과연 이 시를 온전히 읽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토슈즈' 대신 '빗방울'을 넣어 이 시를 읽어 보라. 정말 재미없을 것이다. 그것은 그저 시를 망치기만 할 뿐이다. 그러기보다는 지면에 쓰인 글자 그대로, 즉 '빗방울'이 아니라 '토슈즈'가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는 장면을 떠올리면서 시를 읽어 보라. 어떤가. 재미있고 경쾌하지 않은가. 내가 생각하기에 시 읽기는 시에 적힌 그대로를 경험하는 일이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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