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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월대 남북공동 발굴 중 '고려 금속활자' 출토(상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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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월대 남북공동 발굴 중 '고려 금속활자' 출토(상보) 개성 만월대 출토 금속활자 앞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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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월대 남북공동 발굴 중 '고려 금속활자' 출토(상보) 개성 고려 만월대 출토 금속활자 뒷면

[아시아경제 오진희 기자]올해 '개성 만월대' 남북공동발굴조사 과정에서 고려시대 금속활자 한 점이 출토됐다.


최광식 남북역사학자협의회 위원장은 제7차 만월대 공동조사가 끝난 30일 북한에서 돌아와, 이날 오후 6시 정부서울청사 본관 브리핑실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이같이 밝혔다.

최 위원장에 따르면 조사단은 이달 중순까지 바둑돌, 철갑옷 편, 금제 유물 편 등 작은 유물들을 다수 찾아냈으나 금속활자는 찾지 못하다가, 지난 14일 오전 만월대 서부 건축군 최남단 지역 신봉문터 서쪽 255m 지점에서 금속활자 한 점을 발굴했다. 가로 1.36㎝, 세로 1.3㎝, 높이 0.6㎝, 글자면을 제외한 몸체의 두께는 0.16㎝다.


이 활자는 '전일한 전'(女專)자와 유사해 보이며, 우방 아래쪽 자획은 方자로도 보여 향후 검토가 필요하다. '전일한 전'자는 현재 자전에 존재하지 않는 벽자(僻字)다. 이 활자 이전에 발견된 고려 활자는 현재 북한 평양역사박물관에 한 점, 남한 국립중앙박물관에 한 점이 있다. 하지만 기존 두 점은 발굴조사 중 출토된 것은 아니다. 평양에 있는 활자는 1956년 만월대 유적을 보수하면서 신봉문 서쪽 300미터 지점에서 발견된 것이다. 글자 형태는 '이마 전'(方角頁 )이다.


이 활자는 기존에 알려진 2점 보다 글자 모양이 가장 정교하며, 모양도 정사각형에 가까울 정도로 반듯해 주조기술 수준이 가장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증도가자나 직지는 불경 인쇄를 위해 사찰에서 만든 활자라 할 수 있는데, 이번 만월대 발굴 건은 국가가 주도해 만든 최고 수준의 활자로 보여진다. 북측 조사단은 고려대장경처체와 유사하다는 판단이다.


만월대 남북공동 발굴 중 '고려 금속활자' 출토(상보) 만월대 남북공동발굴조사 결과를 발표 중인 최광식 남북역사학자협의회 위원장


최 위원장은 "기존 두 점과 이번에 발굴한 한 점 모두 벽자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이번 발굴 활자는 만월대 현장 20~30cm 표토층에서 나왔기 때문에 고려 활자임이 분명하다. 다만 구체적으로 몇 세기 활자인지는 더 분석이 필요하다. 북측 조사단은 활자가 나온 서측 발굴지역에서 12~13세기 청자가 가장 많이 나와 연관지어 생각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조사단에 참여한 국립중앙박물관 관계자는 "세 활자 모두 뒷면이 홈자 형태로 파져 있다. 이는 조선시대 금속활자와는 다른 형태"라고 덧붙였다.


최 위원장은 "활자의 시기, 서체, 성분분석 등 추가 연구가 많이 필요하다. 내년쯤 남북공동 학술회의를 염두에 두고 있다. 또한 내년에는 더 많은 기간과 인력을 투입해 만월대 공동발굴을 확대하려 한다"며 "지난달부터 현재까지 만월대 발굴유물 관련 전시를 북측과 남측이 각각 실물과 3D자료를 통해 동시 전시를 진행했는데, 남북관계가 호전돼 앞으로는 공동 전시도 가능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올해 남북 만월대 공동발굴은 지난 6월부터 30일까지 6개월간 최장기간 이뤄졌다. 이 중 서부건축군 7000㎡에서 19동의 건물지와 명문기와, 청자, 용두 등 3500여점의 유물들이 출토됐다. 개성 만월대 발굴조사 사업은 지난 2007년 첫 삽을 뜨고, 2011년 이후 남북관계 상황으로 3년여 간 중단됐다가 지난해 7월 어렵게 재개됐다. 이후 올해는 180일이라는 역대 최장기간 발굴조사에 합의하고, 지난달 13일부터는 남북이 공동으로 발굴한 개성 만월대 출토유물을 전시하게 됐다. 남북이 동시에 개최하는 최초의 전시로, 그 의미도 남달랐다. 30일 부터 다음달 14일까지 서울 광화문 정부서울청사 1층에서는 디지털 자료들을 통해 만월대 전시를 이어나간다.


개성은 470년간 고려의 수도로 당시에는 개경, 송도, 송경으로 불렸다 . 개성특급시 송악산 남쪽 기슭의 고려 황궁이었던 만월대는 고려 황 제와 왕조를 상징하는 정궁이다. 어궐, 용궁 등 다양하게 불렸으며 태 조2년(919) 철원에서 개경으로 도읍을 옮기며 조영됐다. 고려 4대 왕 광종은 황제국 제도를 사용하며 황성을 쌓고 개경을 황도로 칭했다. 거란 침입으로 파괴된 황궁을 중건한 현종은 나성을 비롯해 회경전을 새롭게 건설했다. 이 고려황궁은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소실된 데 이어 1392년 조선건국과 함께 역사속으로 자취를 감춘 채 '만월대(滿月臺)'라는 이름의 궁터로만 남았다. 만월대는 2013년 제 37차 유네스 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오진희 기자 valer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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