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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샘]내 복숭아뼈 속에 사는 여자

시계아이콘읽는 시간55초

모르는 여자의 이름을 불러보는 밤엔 누워 있는데도 복숭아뼈를 다친 발목이 문지방을 넘는다.
과일이 신체에 들어있는 건, 신체로 들어와서 뼈가 되어서 걸을 때마다 사방으로 향기의 얼룩을 흘린다는 건 무슨 뜻일까 모르는 여자는 모르는 여자로 자신의 숲을 걸어야 하는데 이름만 부르는데도 내 품에서 다치는 이유가 무얼까


꿈꾸다가 막 깨어났을 때 그 여자가 전생과 이생의 절취선을 자르고 있는 것이다 뼈를 다칠 때마다 수레바퀴가 곡선만 들고 통증을 넘어오는 것이다 나 대신 꿈을 꾸는 모르는 여자,
잠든, 네 복숭아뼈를 만지면 그곳이 내 슬픔의 기원 같다 어떤 슬픔은 과일에서 맴돌다가 혀끝에서 녹는다
모르는 여자는 모르고 싶은 여자, 복숭아뼈를 만진다 불면이 잠시 멎는다 네가 다녀갔다

-박진성의 '과일의 세계'



발과 다리 사이에 튀어나온 복숭아(복사)뼈는 묘하게 마음을 붙잡는 섹시한 신체 부위이다. 누군가 그 뼈의 이름을 처음 붙였을 때 앙증맞은 복숭아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복숭아가 인간의 몸속으로 들어갔고 그것은 그의 뒤에 선 후손들이 즐겨 호명하는 이름이 되었다.


복숭아꽃은 호색과 음란의 나쁜 운명을 의미하는 도화살(桃花煞)이라는 말을 낳았다. 여인의 얼굴에 복숭아꽃처럼 붉은 빛이 돌면 한 사내로 만족하지 못해 결국 사고를 쳐서 가문을 망칠 가능성이 높다는 옛사람들의 황당한 예언인데, 요즘은 오히려 도화살이야말로 여성의 매력으로 일컬어지니 세상의 생각들은 이렇게도 뒤집힌다. 또 여성의 젖가슴은 수밀도(水蜜桃)라는 중국 복숭아의 비유와 자주 만나는데 물기가 많고 당도가 풍부한 과일이어서 에로틱한 감수성을 담기에 좋았을 것이다. 복숭아가 시인 박진성에게 '모르는 여자'가 되는 것은, 익숙한 상징들을 낯설게 낚아채는 센스일 것이다.


내 복숭아뼈에 살고 있는 여자. 그녀는 나를 걷게 하고 나를 절룩거리게 한다. 그녀는 내 몸 거기에 늘 살고 있지만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다. 도화 향기를 킁킁거릴 때 그녀는 잠시 내 코끝에 안기지만 우린 서로 겹쳐 포옹할 수가 없다. 복숭아뼈는 평소엔 잊고 살다가 아플 때에야 문득 살펴보는 내 몸이다. 아파야 보이는 이 여자, 내 생의 많은 여자들은 복숭아뼈가 아니던가.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여자, 혹은 다 아는 것 같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그녀. 한밤중 그 여자를 가만히 어루만져본다. 그녀를 위로하는 동안, 내가 불면에서 잠으로 들어간다. 한 여자를 꿈에서 만나리라. 상상은 이토록 감미롭고 설렌다.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시인)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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