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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1장 동묘(東廟) 부근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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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1장 동묘(東廟) 부근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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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각설이 역시 떡칠한 분장 아래의 눈가가 쪼글쪼글했다.
“갈 길을 돌리려고, 바람 부는대로 걸어도~”
“앗싸! 얼씨구 좋다!”
“돌아서지 않는 것은 미련인가, 아쉬움인가~”
청승스럽게 돌아가는 노래소리에 맞춰 어느새 술이 한잔 된 늙은 사내 두엇이 앞으로 나와 우스꽝스런 표정으로 몸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자, 날이면 날마다 오는 오늘이 아닙니다. 인생칠십고래장이요, 화무십일홍이라, 꽃 같은 청춘도 한번 가면 되돌아오지 않는 법, 자아, 오늘 여러분께 소개 올릴 것은 또 하나 아시는 분은 다아 잘 아시리라 믿고, 모르시는 분은 지금 아시면 되는, 바로 그 유명한 호골고, 삔 데, 멍든 데, 화상, 타박상, 경상, 중상, 추락상, 신경통, 무릎통, 어깨통, 오십견, 육십견, 일단 한번만 발라주세요. 척 바르면 바르는 순간 바로 시원해지는, 바로 그 호골고, 백두산 호랑이 뼈를 갈아 만든 전설의 연고, 이것 가지고 나왔습니다. 자아.....”


차력사 시범이 끝나자 드디어 본격적인 약장사의 본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지금까지 멋진 시범을 보였던 차력사는 어울리지 않는 표정으로 산더미 같이 약통이 담긴 바구니를 들고 사람들 앞으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아까 정 박는 시범을 보일 때와는 달리 그 역시 초라하고 빈곤한 인상이었다. 그런데다 이마와 입가에 깊게 패인 주름살은 어딘지 모르게 우울하고 심술궂게 보이게 했다. 세월이 지나간 흔적이었다. 세월의 물살만큼 공평하고 잔인한 것이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 그나저나 차력사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어느새 한물 가버려 흔적조차 찾기 어려웠지만 하림 어릴 때만 해도 차력사는 요즘 마술사처럼 인기가 있었다. 초등학교시절 운동장에 학생들을 모아놓고, 백열등을 우적우적 씹어 먹거나, 뜨거운 납물을 입에 넣었다 뱉어내는 것 등의 시범을 보일 때는 얼마나 가슴이 조마조마 했던가. 아까처럼 정으로 가슴을 박게 하거나, 깨어진 병 사금파리 위에 드러누워 사람들로 하여금 밟게 하는 것도 그들의 단골 메뉴였다. 그때는 체육선생이 주로 파트너가 되어주곤 하였다.
그런 어린 시절의 사라진 도사를 이런 시장 바닥에서, 겨우 연고나 팔고 있는 모습으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자아, 한 통에 만원 하는 거, 오늘 여기서는 두 통에 단돈 오천원 한 장 받고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삔 데, 멍든 데, 타박상, 자상, 화상 아무데나 좋습니다. 척 바르는 순간, 아, 감사합니다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신비의 명약...”
여자 각설이는 여전히 엉덩이를 흔들며 메들리로 노래를 불러재끼고 있었다.
“토요일밤, 토요일밤에, 앗싸, 나 그대를 만나리라~”
어디선가 막걸리가 나타나고 춤추러 나온 아저씨의 수도 늘었다.
“이거 진짜 호랑이 뼈루 만든 거 맞나유?”
어떤 허수룩하게 생긴 아저씨가 어수룩한 질문을 던졌다.
“어따 아저씨. 속고만 살았나? 여기 중화인민공화국 보건청하고, 대한민국 보건복지부 인증 마크 따악 찍혀 있는 걸 보면 몰라요?”
남자 각설이가 연고병에 써있는 깨알 같은 잔글씨를 가리키며 짐짓 화난 표정으로 커다랗게 말했다.
하림은 혼자 훗, 하고 웃었다.
하긴 진짜가 가짜가 되고 가짜가 진짜 되는 세상이니 그까짓 오천원짜리 연고가 별 대수냐 싶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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