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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산업 명장]<6>김양호 용접 명장

"화상 입으면서도 용접봉 놓지 않았죠"


[아시아경제 이승종 기자] "가난해서 노력했고 그래서 성공했다."


말은 쉽지만 실천은 어려운 이 짧은 문구를, 삶 속에 그대로 구현해 낸 인물이 있다. 현대중공업에 근무하는 김양호 용접 명장이다. 용접봉을 든 지 28년째인 지난 2008년 당당히 국가 명장에 선정됐다.

그의 집은 가난했다. 9남매 중 장남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바로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다. 그는 부모님에게 말했다. "기술을 배워 동생들 뒷바라지를 하겠습니다." 부모님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기술고등학교에 진학한다.


그는 마음이 급했다. 고교 졸업 후에는 대학 진학 대신 돈을 벌어야 했다. 다시 들판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무작정 교무실을 찾아가 물었다. "사회에서 취업이 잘 되는 게 무엇입니까." 그가 용접의 길을 걷게 된 배경이다.

용접 국가 자격증을 취득하며 고교를 졸업했고 1981년 현대중공업에 입사한다. 그는 입사 이후를 '불꽃과의 전쟁'이라고 표현했다.


그가 다루여야 할 해양 플랜트 부문에선 철강 두께가 일반 제품에 비해 두꺼웠다. 평소의 배 이상으로 용접봉을 휘둘러야 용접이 마무리 됐다. 용접 불꽃은 가끔씩 그의 몸을 스쳤다. 그 때마다 그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해당 부위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다시 말없이 용접봉을 집어 들었다. 몸에 새겨진 화상 반점이 줄어들수록 그의 실력도 나아졌다.


이론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매일 업무가 끝나면 바로 독서실로 달려가 책을 펴들었다. 이튿날이면 어김없이 새벽 5시 반에 일어나 현장으로 나섰다. 작업 현장을 둘러보고 마음을 다잡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보낸 기간이 수십 년. 어느새 그는 용접 관련 자격증만 65개를 보유한 장인이 돼 있었다. 명장이 안 될래야 안 될 수 없게 됐다.


김 명장은 요즘 후진 양성에 한창이다. 현대중공업 내 협력업체를 찾아 기술 전파를 하기도 하고, 근처 마이스터고에서 멘토로 활동 중이기도 하다. "명장이 된 후 오히려 더 바빠진 느낌"이라고 했다.


인터뷰 말미에 그는 현 기술인 환경을 두고 쓴소리를 던졌다. "예전만 해도 공고 졸업때 '기능인이 조국 근대화의 미래다'라는 피켓이 교문 앞에 걸리곤 했습니다. 옛날엔 기능인으로만 살아가도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요즘에는 기능인이 외면받는 것 같습니다. 실업계 고교 졸업생의 90% 이상이 대학에 진학한다니 안타깝습니다. "


그래도 그는 보다 많은 기술인이 양성됐으면 싶단다. "독일처럼 기능인을 우대하는 분위기 조성이 필요합니다. 젊은이들도 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얼마든지 자기계발이 가능하니 대학만 바라보지 말고 다양한 길을 찾아봤으면 합니다."


김 명장은 "용접은 제조업의 꽃"이라며 "이 길을 택한 데 한 점 후회도 없다"고 재차 강조했다. 그는 실로 '대한민국 명장'이었다.


이승종 기자 hanar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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