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병선기자
"그야말로 사필귀정(事必歸正·모든 길은 반드시 바른길로 돌아감)이다." 지난 3일 김정수 삼양식품 부회장은 서울 보코서울명동 호텔에서 열린 신제품 설명회에서 눈시울을 붉혔다. 이날 삼양식품은 소기름으로 만든 라면 신제품 '삼양라면 1963'을 공개했다. 삼양식품이 소기름으로 튀긴 라면을 내놓은 건 1989년 이후 36년 만이다. 김 부회장은 "한때 금기처럼 여겨졌던 우지(牛脂·소기름)는 삼양라면의 풍미를 완성하는 진심의 재료"라며 "삼양식품 창업주이자 제 시아버님이기도 한 고(故) 전중윤 명예회장이 평생 품은 한을 조금은 풀어드리지 않았나 싶다"고 말했다.
김정수 부회장이 3일 서울 중구 보코서울명동 호텔에서 열린 삼양식품 신제품 출시 발표회에서 우지 유탕으로 만든 삼양 1963을 소개하고 있다. 연합뉴스
전 명예회장이 한을 품게 된 건 우지 파동 때문이다. 우지 파동은 1989년 11월3일 삼양식품, 삼립유지, 서울하인즈, 오뚜기식품, 부산유지 등 5개 식품 업체가 미국산 공업용 우지를 사용해 제품을 생산했다는 의혹과 함께 벌어졌다. 이 사실이 밝혀지자 소비자단체는 공업용 소기름을 사용한 삼양식품 등 업체의 제품 판매 중지와 사과 등을 요구했다. 검찰은 우지를 사용한 업체의 대표와 실무자 등을 구속했다.
삼양식품은 억울하다는 입장이었다. 당시 삼양식품 측은 "우지를 라면에 사용한 건 1960년대부터 국민에게 동물성 지방분을 보급한다는 취지"라며 "팜유에 비해 우지 수입 비용이 톤당 100달러 더 비싸다"고 주장했다.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는 우지에 문제 없다고 확인해줬지만 이미 삼양식품의 상황은 어려워졌다. 우지 파동 이후 삼양식품의 라면시장 점유율은 31%에서 10%로 떨어졌다. 게다가 직원 3000여명 가운데 1000여명이 다른 회사로 이직하기도 했다.
15일 서울 시내 한 대형마트에 라면이 진열돼 있다. 한국 드라마, 영화 등으로 인지도가 상승하면서 라면이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농심은 신라면의 3분기 누적 해외 매출이 국내 매출을 넘어섰다. 삼양식품은 지난해 전체 매출에서 해외매출 비중이 57%에 달했다. /문호남 기자 munonam@
우지 파동은 동물성 기름이 몸에 좋지 않다는 편견에서 비롯됐다. 편견의 근원은 1950년대 미국의 생리학자 앤셀 키스가 내놓은 '지질 가설'이다. 키스는 7개국 1만2000여명을 대상으로 역학조사를 진행했고 포화지방 섭취가 높을수록 심혈관 질환 사망률이 높다고 발표했다. 이후 1961년 미국심장협회와 영양위원회는 지질 가설을 참고해 동물성 기름보다는 식물성 기름을 섭취할 것을 권고했다.
하지만 이후 연구에서 키스의 지질 가설이 틀렸다는 결과가 이어졌다. 국제 학술지 '내과학회지'는 2014년 포화지방 섭취와 심혈관 질환 간 관련성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발표했다. 오히려 식물성 기름에 주로 담긴 불포화지방산이 건강에 악영향 줄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최근 나오고 있다. 2023년 미국 메릴랜드대학교 의대 연구진은 식물성 기름에 있는 불포화지방산인 리놀렌산이 미국인의 만성질환을 야기했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키스의 연구진이 지질 가설을 연구하면서 데이터를 조작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연구진이 22개국을 대상으로 역학조사를 진행했지만 입맛에 맞는 7개국의 연구 결과만 골라 발표했다는 것이다.
대중의 편견과 오해로 사라진 음식은 우지를 쓴 삼양라면뿐만 아니다.
2010년대 인기를 끌었던 먹거리 대만식 카스텔라 역시 식용유에 대한 오해 때문에 시장에서 퇴출당했다. 2017년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는 대만식 카스텔라를 만들 때 고급 식자재인 버터 비용을 아끼기 위해 가격이 싼 식용유가 사용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아울러 식용유를 과하게 사용해 높은 수준의 지방이 검출된다고도 강조했다. 대만식 카스텔라 업주들은 억울함을 호소했다. 대만식 카스텔라를 만들 때 빵의 부드러운 질감을 살리기 위해 식용유가 필요하다면서 비싼 버터를 대체하기 위해 식용유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대중들은 이를 외면했고, 결국 대만식 카스텔라를 판매한 프랜차이즈 업체들은 자취를 감췄다.
대만식 카스테라
인공감미료인 사카린은 발암물질이라는 오해를 오랜 기간 받았다. 사카린은 1878년 미국 존스홉킨스대학교에서 발견한 인공감미료로 설탕보다 300배가량 당도가 높다. 하지만 1977년 캐나다 보건방어연구소의 연구 결과가 나오면서 사카린에 대한 불안감이 확산됐다. 실험용 쥐를 상대로 사카린을 대량 투여하자 방광암 발병률이 올라간 것이다. 이후 각국에서 사카린은 발암물질로 취급되면서 사용이 제한됐다.
사카린에 대한 오해가 풀린 건 후속 연구가 속속 발표되면서다. 먼저 캐나다 보건방어연구소의 연구 자체가 문제라는 지적이 나왔다. 실험용 쥐에게 사람으로 따지면 일일 허용섭취량의 500배에 달하는 사카린을 2년간 매일 투여한 것으로 드러났다. 아울러 쥐와 사람의 소변 성분이 같지 않고 삼투압도 차이 나기 때문에 사카린 섭취와 인간의 방광암 사이에는 연관성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같은 연구를 바탕으로 세계보건기구(WHO)는 1992년 사카린이 발암 물질이 아니라고 선언했다. 이후 1998년 국제암연구소(IARC), 미국 독성연구프로그램(INTP), 2000년 미국 식품의약청(FDA) 등도 인체 발암 물질에서 사카린을 제외했다.
현재 사카린은 오히려 항암물질로서 주목받고 있다. 미국 플로리다대학 의대 연구진은 2015년 유방암 세포에 사카린을 투여하자 암세포의 성장 속도가 둔화됐다는 내용의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연구진은 사카린이 유방암, 간암, 신장암 등 전이 속도가 빠른 암의 확산을 막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항생제의 내성을 제거하는 물질로도 사용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올해 4월 영국 브루넬대 연구팀은 국제학술지 '엠보 분자의학'(EMBO Molecular Medicine)을 통해 사카린이 약물 내성 박테리아를 죽이고 기존 항생제의 효과를 높였다고 발표했다. 로난 맥카시 브루넬대 교수는 "다이어트 식품에 사용되는 감미료가 향후 항생제 대체물질로 활용될 가능성을 열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