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석기자
삼성전자는 최근 갤럭시 스마트폰의 '삼성 월렛(Samsung Wallet)'을 통해 코인베이스 애플리케이션(앱)과 연동하고, 북미 지역에서 디지털자산 매매 및 스테이블코인 결제를 지원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앞으로 갤럭시 사용자는 월렛 안에서 디지털자산을 사고팔고 결제까지 할 수 있게 된다. 더 나아가 지난해 삼성의 벤처투자 조직인 '삼성넥스트(Samsung Next)'는 탈중앙금융(DeFi)과 실물자산 토큰화(RWA)에 특화된 블록체인 개발사 '베라체인(Berachain)'에 투자하며 미래 금융 인프라 선점 의지를 분명히 했다.
문제는 이러한 사업과 투자가 한국에서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점이다. 그 배경에는 이른바 '금가분리(金假分離)' 원칙이 있다. 이는 2017년 가상자산 투자 열풍 당시 금융 당국이 '기업과 연기금의 디지털자산 투자를 금지'하는 행정지도를 시행한 이후 굳건하게 유지된 그림자 규제다. 그 결과, 국내 대부분 기업은 디지털자산 투자나 관련 신사업 시도조차 어려운 경직된 현실에 놓여 있다.
반면 세계는 숨 가쁘게 변화하고 있다. 올해 7월, 미국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GENIUS 법안'에 서명하며 스테이블코인을 공식 제도권으로 편입시켰다. 이 법안은 민간이 발행한 스테이블코인을 연방정부 감독 아래 두되 달러 결제 인프라의 일부로 활용하도록 허용한다. 이는 달러 패권을 디지털 영역으로 확장하겠다는 미국의 명확한 선언이다.
더 나아가 트럼프 행정부와 미국, 일본 등의 일부 상장기업은 디지털자산 비축 전략을 공식화하고 있다. 현재 전 세계에서 유통되는 스테이블코인의 약 55%가 이더리움 네트워크 위에서 처리된다. 이더리움은 수초 내로 전 세계로 자금을 이동시키면서, 지난 수십 년간 비자나 마스터카드가 수백조 원을 들여 구축한 금융 인프라를 대체할 수 있는 훨씬 빠르고 비용 효율적인 차세대 금융 인프라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제대로 된 디지털자산에 대한 투자는 비자와 같은 결제 인프라 기업에 대한 초기 투자와 같다.
그러나 지난 8년간 한국 정치권과 당국은 디지털자산에 대해 '제2의 바다 이야기' '내재적 가치가 없다'와 같은 발언을 쏟아내며 규제 일변도로 대응해 왔다. 그 결과, 국내 혁신기업들은 미국에서 서클과 코인베이스 같은 시가총액 수십조 원대의 기업이 탄생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연기금과 금융권 역시 정부의 눈치를 보느라 급성장한 디지털자산 시장에 발도 제대로 들여보지 못했다.
삼성전자가 TSMC와 애플 같은 글로벌 거대기업들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블록체인 기술과 디지털자산에 대한 과감한 투자와 활용이 필수적이다. 한 분석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전 세계 법인 간 내부 거래를 스테이블코인으로 결제할 경우 해외송금 및 환전 수수료 절감으로 연간 1억달러(약 1400억원) 이상을 아낄 수 있다고 한다. 이를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 전반으로 확대하면, 그 경제적 효과는 연간 수조, 수십조 원에 달할 수 있으며 코스피 5000을 향한 강력한 성장 동력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은 여전히 2017년의 낡은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월렛 기능이 글로벌에서는 금융 혁신으로 평가받지만, 한국에서는 감히 시도조차 조심스러운 영역에 놓여 있다.
1995년 이건희 회장은 "기업은 이류, 행정은 삼류, 정치는 사류"라는 유명한 발언과 함께 "반도체 공장 하나 세우는 데 도장 천 개가 필요한 게 말이 되느냐"라고 질타했다. 전 세계가 치열하게 혁신 경쟁을 벌이는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은 과연 지난 30년 동안 한국 정치와 행정은 얼마나 발전했는지를 묻게 한다.
우리는 다가올 30년 동안 지난 30년에 비해 수십 배 빠른 변화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정부는 이제 과거의 족쇄부터 풀어야 한다. 법적 근거 없이 혁신을 가로막아 온 2017년 가상자산 행정지도의 유효성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밝히고, 모든 그림자 규제를 원천적으로 금지해야 한다. 나아가,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대등하게 싸울 수 있도록 디지털자산법안의 연내 통과와 함께 법인의 투자 가능 여부, 회계 처리 기준 등 명확한 기준을 담은 가이드라인을 신속하게 제시해야 한다. 전 세계가 갤럭시 폰을 통해 스테이블코인 결제를 할 때 우리 국민들만 배제되는 촌극이 벌어지기 전에 말이다.
서병윤 디에스알브이랩스(DSRV) 미래금융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