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영기자
일본 채용 박람회 자료사진. 아시아경제DB
일본에서 내년 봄 졸업 예정인 고등학생들을 겨냥한 채용 시즌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저출산과 인구 감소 여파로 인력난이 갈수록 심화하는 가운데 일본 기업들은 과거 대졸 채용에 집중하던 틀을 깨고 고졸 채용에도 과감한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초봉을 대폭 높이고 대학 학비 지원, 자격증 취득 비용 면제 등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며 '인재 쟁탈전'이 본격화하는 모습이다. 전문가들은 "구직자보다 채용 수요가 훨씬 많은 '구직자 우위 시장'이 굳어진 일본에서 고졸 인재 확보 경쟁은 더 치열해질 것"이라고 전망한다.
16일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에 따르면 회계 시스템 업체 TKC는 내년 입사하는 고졸 사원 전원을 대상으로 대학 진학 비용을 지원해주는 제도를 도입하기로 했다. 이 제도는 고졸 입사자에게도 대졸 인재와 같은 커리어 기회를 제공하려는 취지다. 신입 고졸 사원들은 업무 시간 일부를 대학 수업에 배정받아 5년 내 졸업을 목표로 한다. 이 회사의 고졸 채용 담당자는 닛케이에 "경제적 사정으로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우수한 학생을 채용하는 것이 목적"이라며 "이미 졸업해 대졸로 활약 중인 고졸 출신 사원도 있다"고 말했다.
저출산과 인구 감소에 직면한 일본 기업들은 최근 심각한 인력난을 겪고 있다. 후생노동성 집계에 따르면 내년 봄 졸업 후 취업을 희망하는 고등학생은 7월 말 기준 약 12만6000명으로, 전년보다 0.5% 늘었다. 같은 기간 고졸 대상 구인 건수는 46만7000건으로 0.3% 증가했다. 구인배율(구직자 1명당 일자리 수)은 3.69를 기록해 지난해 최고치(3.70)와 비슷한 수준을 이어갔다. 닛케이는 "구직자보다 채용 수요가 훨씬 많은 '구직자 우위 시장'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 고졸 처우 개선을 촉진하고 있다"고 짚었다. 사실상 기업이 구직자의 선택을 받기 위해 경쟁하는 구도가 된 셈이다.
일본 도쿄 거리. 픽사베이
이에 일부 기업은 고졸 직원의 초봉을 올리거나 자격증 지원, 기숙사 제공 등 다양한 복지 혜택을 확대해 인재 유치에 나서고 있다. 고속버스 운영사 윌러 익스프레스는 경력과 나이에 상관없이 첫해부터 연봉 600만엔(약 5600만원) 수준의 파격적인 임금 조건을 내걸었다. 후생노동성이 발표한 고졸 임금은 2024년 기준 월 약 18만엔(약 170만원)으로, 연봉으로 환산하면 210만엔(약 2000만원) 수준이다. 외식업체 레드랍스터 재팬은 처우 개선과 근무 환경 정비를 통해 고졸 채용 인원을 기존 연 5명에서 두 배로 확대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또 주류 대기업 히토마이루 역시 입사 후 운전면허 취득 비용을 지원하고 3년 근속 시 비용을 전액 면제하는 제도를 운영한다.
고졸 채용을 새로 도입하거나 강화하는 기업도 늘고 있다. 일본 기업 중 2026년 졸업 예정자 채용 계획에서 고졸 채용 인원을 늘리겠다고 밝힌 곳은 전체의 30%가 넘었으며 최근 5년 내 고졸 채용을 시작한 기업도 34%였다. 특히 이 같은 움직임은 인력 부족이 심각한 건설업, 운송업, IT 관련 업종 등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고 매체는 전했다. 닛케이는 "채용 수요가 구직자 수를 훨씬 웃도는 '구직자 우위 시장'이 고졸 처우 개선을 밀어붙이고 있다"며 "학력에 관계없이 우수한 인재를 확보하려는 기업이 늘면서 고졸 채용 시장이 과거와는 전혀 다른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흐름이 단순히 채용 방식의 변화가 아니라 일본 사회 전반의 변화를 보여준다고 분석한다. 인구 감소와 고령화로 일할 사람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기업들은 학력보다 현장에서 바로 적응할 수 있는 능력과 계속해서 배워나갈 수 있는 태도를 더 중시하게 됐다는 것이다. 또 일본 특유의 장기고용 문화 속에서 고등학교 졸업자를 일찍 채용해 회사에서 키우는 것이 기업 입장에서는 효율적이라는 판단도 작용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고졸 채용은 이제 부수적인 선택이 아니라 기업 경쟁력을 높이는 중요한 전략으로 자리 잡고 있다"며 "기존의 학력 중심 고용 관행에도 변화가 나타날 수 있다"고 전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