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채석기자
"준비된 내용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오른쪽 두번째)이 28일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열린 '금융감독원장-은행장 간담회'에 참석해 모두발언 하고 있다. 왼쪽부터 윤호영 카카오뱅크 대표, 김태한 경남은행장, 이환주 국민은행장, 이 원장, 정상혁 신한은행장. 2025.8.28 강진형 기자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이 28일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열린 은행장 간담회에서 건넨 첫 발언이다. 그는 입장 후 약 9분간 미리 준비해 온 원고를 그대로 읽었다. 책상 위에는 원고뿐이었고 그 안에는 소비자보호, 금융범죄 엄정대응 등 사전에 공개된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언론과 만나는 공식석상에서는 신중했지만, 은행장들과의 비공개 대화는 예상보다 깊고 길었다. 이 원장은 이날 오후 3시 시작 예정 시간보다 5분 일찍 도착했다. 은행장·부행장·상임이사 22명 중 대다수는 미리 현장에 자리해 있었고, 짧은 환담까지 포함해 간담회는 계획보다 앞서 시작됐다.
예정보다 5분 빨리 시작한 간담회는 25분 늦게 끝났다. 오후 3시17분부터 약 1시간8분간 진행된 비공개 회의에서 은행장 20여명은 각각 2~3분간 발언했고, 이 원장은 이를 빠짐없이 경청했다. 위험가중치(RWA) 완화 등 자본 규제와 관련 건의가 많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주가연계증권(ELS) 과징금 같은 현안에 대해선 구체적 지침을 내놓지 않고 "충분히 검토한 뒤 메시지를 전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의 신중함은 기자 응대에서도 드러났다. 회의장에 들어가며 ELS 과징금 관련 질문을 받았지만 답하지 않았고, 퇴장하며 "간담회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갔느냐"라는 질문에는 "나중에"라고만 했다.
은행장들 역시 말을 아꼈다. 간담회 직후 이환주 KB국민은행장, 정상혁 신한은행장, 최우형 케이뱅크 행장 등은 질문을 받았으나 침묵을 지켰다. 김성태 IBK기업은행장은 "(ELS 과징금 등) 현안 이야기는 없었다"고만 전했다. 조용병 은행연합회장은 "보도자료에 나온 내용 그대로였다"며 짧게 답했다.
이찬진 금감원장은 28일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열린 은행장과의 간담회에서 '준비된' 원고만 꺼낸 채 모두발언을 했다. 이 원장 맞은편 인사는 이은미 토스뱅크 행장(왼쪽부터), 황병우 iM뱅크 행장, 신학기 Sh수협은행장, 강태영 NH농협은행장, 이호성 하나은행장. 문채석 기자
이 원장은 당분간 공식 일정 직후 언론 백브리핑을 하지 않기로 했다. 현안을 충분히 파악한 뒤 준비된 메시지를 내놓겠다는 뜻이다. 금융시장에 불필요한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 섣부른 발언은 피하겠다는 원칙으로 해석된다. 취임 2주 만에 내부 임원회의 내용이 외부로 유출되며 '리더십 부족' 지적을 받은 점도 신중함을 강화한 배경으로 꼽힌다. 더구나 이재명 대통령 최측근으로 알려진 만큼 정치적 해석이 뒤따를 수 있다는 점을 의식해 언행을 조심한다는 분석도 있다.
이 원장은 언론에는 말을 아끼고 대신 내부 구성원 및 금융권 인사들과는 심도 있는 논의를 이어가는 '정중동(靜中動)' 행보를 추구할 것으로 관측된다. 백브리핑을 통해 적극적으로 메시지를 전했던 이복현 전임 원장과는 확실히 차별화되는 행보라는 평가다.
정중동 행보에 대해선 평가가 엇갈린다. 금감원 내부에서는 "겉으로는 정제된 메시지만 내놓고 안에서는 현안 파악에 집중하는 행보가 긍정적"이라고 보고 있다. 임직원들은 '비전문가' 꼬리표를 떼기 위해 야근까지 불사하며 현안 파악에 속도를 높이는 원장에 대한 기대감을 보이고 있다.
반면 금융권 일각에서는 "간담회와 국정감사, 내부 임원 인사 및 조직 개편 이후에도 지나치게 신중한 기조가 이어지면 불필요한 추측과 뒷말을 낳을 수 있고 관계가 경직될 수도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이날 침묵을 지켰던 은행장들처럼 향후 보험·저축은행·증권·빅테크(대형 정보기술 기업)·여신·가상자산 업권 수장들 역시 말을 아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전임 원장의 거침없는 소통 스타일을 의식해 반대로 언론 및 외부와의 대화에 선을 긋는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 원장 측근인 금감원 관계자는 "부임 초기라 업무량이 많아 (원장과)함께하는 시간이 길지만, 성품이나 스타일을 단정하기는 이르다"며 "다만 알려진 대로 본인 의견을 정할 때까지 충분히 듣고 판단하는 스타일은 맞고, 특정 인물을 의식하고 행동하는 것 같진 않다"고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