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슬기자
드라마 '사마귀: 살인자의 외출' 한 장면. 사진제공=SBS
"여성 서사를 꼭 해보고 싶어요."
최근 드라마·영화 연출자들 사이에서 자주 들리는 말이다. '군텐츠(군대+콘텐츠)'의 선구자로 불린 민진기 감독 역시 특기인 남성 연대 서사를 내려놓고, 중년 여성 네 명이 범죄자를 쫓는 이야기 '살롱 드 홈즈'를 연출했다. 시장에서 '통하는 작품'의 기준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26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올해 하반기 방송가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는 여성 서사를 전면에 내세운 드라마를 잇달아 선보인다. 남녀 로맨스와 신데렐라식 판타지에 의존하던 공식을 벗어나, 여성의 연대와 자립을 주축으로 한 작품들이 편성의 중심에 올랐다. 고현정의 '사마귀: 살인자의 외출', 이영애의 '은수 좋은 날', 전지현의 '북극성' 등 주요 채널과 플랫폼 신작들의 공통점은 바로 '여자의 이야기'다.
고현정은 SBS 금토드라마 사마귀에서 피해자가 아닌 연쇄살인마로 복수극을 이끈다. 복수라는 익숙한 소재를 다루면서도 남성 중심의 대립 구도를 걷어내고 여성의 시선을 전면에 배치했다. MBC '메리 킬즈 피플' 역시 여성적 관점을 강화한 범죄 심리극이다.
이영애의 KBS 복귀작 은수 좋은 날은 모성과 희생에 갇힌 중년 여성 서사를 벗어나 개인의 일상과 변화를 그린다. 전지현 주연의 디즈니+ 첩보극 북극성은 여성을 위기를 견디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사건을 주도하는 주체로 묘사한다. tvN '폭군의 셰프'는 요리와 사극을 결합해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주체적 여성상을 제시한다. 윤아가 맡은 인물은 음식을 생존과 권력의 무기로 삼으며 극을 이끈다.
장르와 소재는 달라도, 여성의 목소리와 연대·자립을 중심에 둔다는 점에서 이들 작품은 맥락을 공유한다.
tvN 드라마 '폭군의 셰프' 스틸 이미지. 사진제공=SM엔터테인먼트
해외 흐름도 크게 다르지 않다. 글로벌 흥행 중인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K-Pop Demon Hunters)'는 걸그룹 '헌트릭스'가 세계적 스타이자 동시에 악마 사냥꾼으로 활동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루미·미라·조이 세 멤버는 서로의 상처와 불안을 공유하며 연대한다. 특히 루미는 자신의 몸에 새겨진 악마 같은 문신 때문에 수치심을 느끼지만, '다름'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성장한다. 연출을 맡은 매기 강 감독은 이를 "자기 정체성과 마주하는 커밍아웃의 은유"라고 설명했다.
케데헌은 단순한 판타지가 아니라 여성 캐릭터의 연대와 정체성 확립을 전면에 내세운다. 영국 가디언은 "겉으로는 K팝 걸그룹의 화려한 이야기를 담은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성 주체 서사를 중심에 둔 영리한 작품"이라며 "산업과 장르의 공식을 비트는 구조가 인기 요인"이라고 평가했다.
과거 드라마 시장에서 안정적 흥행을 보장한 장르는 남녀 로맨스였다. 그러나 주요 시청 타깃인 2049 여성층은 이제 '연애'보다 성장과 '연대'에 더 큰 공감을 보낸다. 제작사와 플랫폼이 여성 주인공 콘텐츠를 전략적 투자 대상으로 보는 이유다.
박현민 대중문화평론가는 "여성 서사가 단순한 다양성 실험이 아니라, 실제 흥행 공식을 바꾸는 주류 전략으로 자리 잡았다"며 "여성 주체 이야기가 국내외 대중과 충분히 접점을 형성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고 분석했다. 이어 "앞으로 제작 환경 전반에서 여성 창작자와 여성 중심 콘텐츠에 더 많은 기회와 자원이 투입되는 선순환이 촉발될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