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민기자
국내 반도체 패키징 분야 고부가 핵심 기술 유출자를 처음으로 긴급체포한 건 우리 산업안보가 그만큼 절박한 상황에 놓였다는 점을 보여준다. 국내 반도체 패키징 시장은 2년 후 40조원 규모로 성장이 예상된다. 중국보다 앞서는 몇 안 되는 첨단기술인 고대역폭메모리(HBM) 후공정이 정조준됐다는 점에서 우리 기술을 노리는 시도가 한층 노골적으로 나타났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반도체 기업 관계자는 26일 "최근 기술유출을 시도하는 방법이나 수위가 내부 문서 유출 차원을 넘어선다"며 "정부 차원의 대비와 지원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업계에선 이번에 긴급체포된 반도체 패키징 업체 직원 사건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회사 내부에서 사람과 기밀문서를 단속하는 것만으로는 기술유출을 막기 어려운 시대란 하소연도 끊이질 않는다. 협력업체를 가장해 내부 도면을 이메일로 요구하는 등 수법이 다양해졌다.
중국 자본이 국내에 위장 법인을 세우고 자문회사나 특허관리전문기업(NPE)을 통해 기술 유출을 시도하는 사례도 포착되고 있다. 이미 반도체 장비 기술을 유출한 국내 장비업체 직원이 중국과 연계된 법인을 따로 만들어 자사 기술을 밀반출하려다 재판에 넘겨진 사건도 발생했다. 또 다른 사건에선 중국 기업이 국내 장비업체 기술자를 고액 연봉으로 영입한 뒤 이직한 기술자가 자체 설계도면을 통째로 중국 법인에 넘긴 혐의로 기소됐다.
이 같은 기술 유출이 더욱 위협적인 건, 우리 경제의 성장동력에 직접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은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기술 전반에서 기술 격차를 빠르게 좁혀오고 있다. 유출 피해는 곧바로 우리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한국IR협의회 분석에 따르면 국내 반도체 패키징 시장은 연평균 29.3%의 성장률을 보이고 있다. 2020년에는 8조3891억원, 2022년에는 14조257억원을 기록했고 2027년에는 40조7288억원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됐다. 특히 해당 패키징 기술은 인공지능(AI) 반도체 구현을 위한 필수 공정으로 꼽힌다. 이번에 유출이 시도된 기술은 바로 이 HBM의 성능과 직결된다. 만약 중국으로 유출됐더라면 HBM 경쟁력은 물론, AI 반도체 공급망 주도권 자체가 넘어갈 수 있었다는 얘기다. 이 경우 국내 산업 기반 전반에 미칠 충격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지게 된다.
이 때문에 기술유출 사범 첫 긴급체포는 해외로 도피 또는 기술을 유출하는 접선지로 향하는 범인의 퇴로를 끊고 체포가 가능한 사정권을 넓혔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법원은 영장 없는 긴급체포를 인정하고 사후에 영장을 발부했고 경찰 등 여러 기관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거둔 성과다. 기술유출에 대해선 보다 강경하게 대응한다는 점을 확인한 상징적인 조치로 인식되고 있다.
국가정보원의 '산업기술 해외유출 적발건수' 통계에 따르면 2023년부터 2024년까지 2년간 적발된 산업기술 유출은 총 46건이었다. 이 가운데 반도체가 21건으로 전체의 절반에 가까운 비중을 차지했고 디스플레이 11건, 자동차 5건, 조선 4건, 이차전지 2건 등이 뒤를 이었다. 반도체 기술이 가장 집중적으로 노출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사건의 파장은 더욱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산업통상자원부 등 정부 부처들이 머리를 맞대고 법령과 제도 정비에 나서야 한다고 조언한다. 현행 산업기술보호법은 기술의 유출 및 침해 행위를 금지하는 대상으로 '개인'으로 명시해놨을 뿐 '법인' 등 단체에 대해선 언급이 없다. 이로 인해 기업과 펀드를 앞세워 유출 작업에 나서는 중국을 막을 법적 대비가 현재로선 없는 실정이다.
법조계에선 기술유출 사범에 대한 긴급체포를 폭넓게 허용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술은 무형자산이어서 신속하게 신병을 확보하지 못하면 수사나 피해 회복이 어려운 데다 공항 검역이나 세관 단속으로 걸러내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경찰과 검찰, 국정원 등 관계 기관이 의심 정황을 조기에 포착해 대응하는 체계를 정교하게 운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손승우 법무법인 율촌 지식재산권·기술 고문(전 한국지식재산연구원 원장)은 "이번 첫 긴급체포 건은 여러 기관 간 협조가 유기적으로 이뤄졌지만 일반적이진 않다"며 "우리 수사기관들이 발빠르게 초동 대응을 할 수 있도록 수사 및 체포 시스템을 재정비해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기업들은 내부 대응을 한층 강화하고 있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기술 유출에 대한 경각심이 매우 높아 각종 시스템을 통해 사전 차단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며 "정밀한 모니터링 체계를 운영 중이지만 보안상 세부 내용은 밝히기 어렵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