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조르기 외교’된 韓 배터리 아웃리치

“상황이 급한지라 일단 가는 겁니다.”

이달 초 최중경 국제투자협력대사와 산업통상자원부, 한국배터리산업협회, 배터리 3사(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온)의 미국 순회 아웃리치(외교접촉) 일정에 앞서 정부 관계자가 내놓은 배경 설명이다. 이 관계자는 “미국에 가는 것 자체보단 가서 어떤 활동을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미국에 가봐야 알 것 같다”고 설명했다. 요약하자면 “확정된 일정 없이 일단 가고 본다”는 식의 말이었다.

방미 일정 끝자락에 앤디 베쉬어 켄터키 주지사와 최 대사가 만났다는 소식이 얼마 전 전해졌다. 최 대사와 배터리 3사 등은 당초 켄터키, 오하이오, 미시간 등 총 6개 주에 주지사 면담을 요청했다고 한다. 6개 주 모두 국내 배터리 3사가 대거 투자한 주요 지역들임에도 켄터키 주 외엔 회동이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베쉬어 주지사와의 만남도 구체적인 협의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최 대사가 악수하는 사진 외에 모두발언도 전해지지 않았다. 아웃리치 성과를 알 길이 없다.

외교는 철저히 이해관계에 의해 약속돼야 하는 교섭의 장이다. 특히 이번 대미 아웃리치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파격적인 관세 정책이 추진되는 와중에 이뤄졌다. 그만큼 엄중하다.

주지사를 통해 연방 정부까지 닿는다는 정부 전략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무작정 미국행 비행기에 올라 주지사와의 면담을 사전 협의 없이 추진하는 건 ‘조르기 외교’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켄터키 주지사와의 만남이 성사되기 전날까지도 한 취재원은 “주지사 만남이 한 명도 성사되지 않아 초조한 상황”이라고 전했다. 오랜 시간 다져놨어야 할 물밑 작업이 부족한 탓에 외교를 맨땅에 헤딩하듯 추진한 셈이다.

업계 관계자는 “국내 정치가 혼란한 상황에서도 아웃리치는 좋은 시도였지만 단순 방문 횟수만 늘리지 말고 효율성 있는 전략을 갖추고 방문해야 했다”고 지적했다. 학계 관계자도 “정치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우리 정부가 그간 트럼프 정부에 대한 준비와 전략이 터무니없이 부족했다”고 꼬집었다.

이번 방미는 실질적인 성과보다 보여주기식 대미 접촉을 우선한 것 아니냐는 인상을 지울 수 없게 했다. 그동안 장기적인 관점에서 비용과 시간을 들여 긴밀한 네트워크를 건설했는지도 의문이다. 떠나기 전 방문단은 ‘풀뿌리 아웃리치’라는 이름을 내걸었다. 바닥부터 다지는 체계적인 물밑작업이 있어야 어울리는 명칭이다. 평소 인맥 관리는 기본이다. 한국이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임을 강조하고 설득하기 위해선 주지사들뿐 아니라 미국 조야와의 관계부터 먼저 점검할 필요가 있다.

산업IT부 심성아 기자 heart@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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