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준기자
걷기의 전성시대입니다. 걷기 여행, 맨발 걷기, 등산, 도보여행 등 걷기를 기본으로 하는 여가 생활이 폭발적으로 인기입니다. 전국적으로 걷기 좋은 길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럴 때 우리나라 옛길의 대표라 불릴만한 길을 걸어보는 것도 좋을듯합니다. 옛적 선비들이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넘나들던 그런길입니다. 바로 문경새재 옛길입니다. 그야말로 길의 고전(古典)으로 통합니다. 오래된 길이 내뿜는 그윽한 향기로 가득합니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이란 타이틀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문경새재는 다른 옛길과 달리 길이 살아 있다것이 더 매력적입니다. 험준한 백두대간 사이로 뻗은 흙길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려 활기가 넘쳐납니다. 이번 여정은 문경 쪽 주흘관에서 시작해 고갯마루의 조령관을 지나 괴산 고사리 수옥폭포에서 마무리하는 10km에 이르는 옛길 코스입니다. 그 옛날 선비들이 걸었던 흔치 않은 소중한 길을 따라 가을맞이 여행에 나서봅니다.
문경새재의 새재는 조령(鳥嶺)을 우리말로 읽은 것으로, ‘나는 새도 넘기 힘든 고개’라는 의미다. 또 다른 유래는 문경읍의 하늘재와 괴산군 연풍면의 이화령 사이에 만들어진 고개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문경새재는 부산 동래에서 한양으로 가는 최단 거리여서 교통과 국방의 요충지로 여겨졌다.
문경새재 외에도 영남지방에서 한양으로 가기 위해서 넘을 수 있는 고개는 죽령고개와 추풍령고개가 있다. 하지만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가는 사람들은 죽령고개를 넘으면 시험을 죽을 쑬까 봐, 추풍령고개로 가면 추풍낙엽처럼 낙방할까 봐 걱정돼서 주로 문경새재를 이용해서 한양에 갔다고 한다.
길을 나섰다. 문경새재 주차장을 지나 ‘한국의 아름다운 길’이란 간판을 만나면서 마음이 설렌다. 옛길박물관을 지나면 돌로 쌓은 성문인 주흘관의 웅장한 모습이 펼쳐진다.
주흘관은 그 뒤로 암봉이 두드러진 조령산(1025m), 문경의 진산인 주흘산(1075m)과 어울려 범접할 수 없는 기품을 물씬 풍긴다. 주흘관 주변에는 하천이 흐르고 그 곁에 수천 명의 병사가 머물러도 좁지 않을 거 같은 넓은 잔디밭이 펼쳐져 있다. 잔디밭 끝에 성벽이 길게 자리한 모습도 멋있었지만, 성벽 곁을 둘러싼 험준한 산세가 천혜의 요새나 다름없다.
문경새재 옛길을 이색적으로 즐기는 방법이 있다. 옛길은 황토로 되어 있다. 신발을 벗고 쉬엄쉬엄 걷는 것을 추천한다. 황톳길을 더 걷고 싶지 않다면 새재계곡으로 가서 발을 닦고 다시 신발을 신을 수 있다.
주흘관을 지나면 왼쪽으로 드라마 ‘태조 왕건’을 촬영했던 KBS 세트장이 나온다. KBS가 문경새재 오픈세트장에 세트장을 지은 건 조령산과 주흘산의 산세가 고려의 수도인 개성의 송악산과 비슷해서였다고 한다.
다시 호젓한 길을 따르면 조령원터와 교구정이 차례로 나온다. 조령원은 옛 관리들을 위한 숙박 시설이고 교구정은 경상도 감찰사 이취임식이 열리던 곳이다. 그 앞의 구부러진 소나무가 일품이다. 교구정 앞에서는 잠시 계곡 구경을 하는 것이 좋다.
계곡길을 따라 좀 오르면 용추폭포에 닿는다. 팔왕폭포라고도 부르는 이 폭포는 암반이 발달해 계곡미가 수려하다. 예전에는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팔왕폭포는 사극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한눈에 특정 드라마의 장면이 떠오를 거다.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었어, 인생이 찰나와 같은 줄 알면서도 왜 그리 욕심을 부렸을꼬. 이렇게 덧없이 가는 것을…."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궁예가 자기 부하들에게 최후를 맞이하며 했던 대사다. 팔왕폭포 곁에는 이 대사가 적힌 안내판이 있다.
다시 길을 나서 500m쯤 가면 훈민정음으로 쓴 ‘산불됴심’ 표석이 눈에 들어오고 시원한 물소리와 함께 조곡폭포가 나타난다. 인공폭포지만 바라보기만 해도 시원하기 그지없다.
폭포를 지나면 두번째 관문인 조곡관을 만나게 된다. 성문 안으로 들어서면 미끈한 금강소나무들이 반기고 드문드문 물박달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산자락에 둘러싸여 천연 요새라 불리는 조곡관은 장송과 기암절벽, 맑은 계곡이 어우러져 더위를 식히며 쉬어가기 좋다.
길을 따라 제3관문으로 가다보면 갈림길이 하나 나오는데 장원급제길이다. 장원급제길은 말 그대로 영남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던 옛길이다. 낙동강의 3대 발원지 중 하나인 초첨(조령약수)가 있다. 또 돌을 책처럼 쌓아놓은 책바위는 웅장하다. 선비들이 하나 둘 찾아와 장원급제의 소원을 빌었다고 한다.
잔뜩 찌푸리고 있던 하늘에서 소나기가 쏟아졌다. 계곡을 따라 이어진 옛길엔 어느새 운무(雲霧)가 끼었다. 몽환적인 분위기에 제법 운치가 묻어난다. 길 주변엔 조령산과 주흘산 등 위풍당당한 산들이 운무에 가려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
책바위를 지나 비내리는 과거길을 산책하듯 걷다보면 조령관이 서 있는 새재 고갯마루에 도착한다. 이곳은 제법 널찍한 공터로 조령산과 주흘산 일대를 조망하기 좋다.
보수공사중인 조령관을 지나면 이제 괴산 연풍땅인데, 도로를 좀 내려가면 조령산자연휴양림으로 들어간다.
휴양림을 지나면 수려한 신선봉(967m)이 올려다보이는 고사리 마을에 이른다. 주차장 삼거리에서 왼쪽 길을 따라 20분쯤 내려가면 수옥폭포다. 계곡에 발을 담그며 약 20m 절벽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를 바라보며 새재 걷기를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