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한 詩]패배/허연

학창 시절 주먹다짐에서 나한테 졌던 친구가갑자기 죽었을 때그 옛날 난이긴 것이 아니라 진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상갓집에서 육개장을 앞에 놓고맥없이 젓가락의 키를 재면서눌러도 눌러도 고개를 드는 이제는 흑백이 된 죄책감에 대해생각했다(지금도 잊지 못하니 내가 진 것이지)머리를 흔들며 혼자 미안해하다다시 영정 사진을 올려다봤다속엣말로사실은 내가 졌다고독한 척했던 내가 사실은 더 겁쟁이였다고 털어놓았다아직 앳된 상주의 어깨를 다독이고상갓집을 걸어 나오다절대적으로 흘러가 버린 시간들을 떠올렸다그때 친구의 얼굴 표정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기세등등한 나를 올려다보던영양의 눈빛.상갓집을 나와 걷는 길등 뒤에선 찬바람이 오고기억들은 나비 떼처럼보도블럭 위를 날아다니고 있었다
■주먹다짐까지는 아니더라도 누구나 어릴 때 친구와 다투었던 적이 있을 것이다. 물론 대개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세 깔깔거리면서 어깨동무를 하고 동네를 뛰어다녔겠지만, 간혹은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못한 채 "눌러도 눌러도 고개를 드는 이제는 흑백이 된 죄책감"으로만 남은 경우도 없지 않을 것이다. 도대체 그때 왜 그랬을까? 아무리 후회하고 자책한다 한들 "절대적으로 흘러가 버린 시간"은 결코 되돌릴 수가 없다. 게다가 친구가 죽어 버리기까지 했으니, 시인의 "죄책감"은 이제 영영 갚을 길 없는 부채가 된 셈이다. 니체가 말했듯이 윤리는 빚진 자의 것이다. 이 시에 적힌 단어들("기억"-"들")을 더하여 말하자면, 윤리의 출처는 자신이 잘못한 바에 대한 지속적인 기억하기다. 자신의 죄를 끊임없이 기억하는 자만이 비로소 윤리적인 인간으로 탈피("나비")할 수 있다. 채상우 시인<ⓒ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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